텍스트의 즐거움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모종의 분위기를 위하여
평범한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대부분 표면적이다. 우리는 미인의 기준을 얼굴에 두지 내면에 두지 않는다. 우리는 스마트폰의 사용법을 궁금해하지 작동 원리를 궁금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상업 미디어와 출판물은 표면적인 것들, 즉 실용적인 것을 다루려 한다. 유사 이래, 흔히 말하는 좋은 직업과 좋은 벌이는 그런 실용을 따라 형성되어 왔다. 즉 누군가 돈을 벌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에 그 역시 관심을 둬야 한다.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 페르난두 페소아는ㅡ안타깝게도ㅡ표면적이자 실용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글은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인간 내부의 다분히 근원적인 것을 향했다. 간혹 내게 '순수문학이 대체 무엇이냐' 하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페소아가 쓴 책, 예로 가 ..
2019.07.05 23:29 -
파트리크 모디아노 <신혼여행>, 나는 행복했던 것 같다
첫째 아이와 함께 서울 용산역으로 기차를 타러 가는 날이었다. 아내는 둘째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첫째 아이까지 돌볼 여력이 없었다. 우리는 대구에 계신 할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아이를 지방으로 데려가는 일은 내 담당이었다. 기차를 탈 때마다 으레 그랬듯이 이번에도 기차에서 읽을 책을 고르고자 책장을 훑어보았다. 짐이 많으면 불편하기에 얇은 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얇으면서도 내용이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은 책. 한쪽에 쌓여 있는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집에 눈길이 갔다. 그의 책은 대체로 얇아서 내 요구조건에 맞았다. 여러 책 중 특히 이 눈길을 끌었다. 문득 이언 매큐언의 가 떠올랐다. 제목처럼 신혼부부에 관한 내용일까? 어쩌면 우리 같은 신혼부부. 난 이 책을 전..
2022.05.30 14:43 -
안토니오 타부키 <플라톤의 위염>, 예술적인 것의 필연적 패배
1.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에서 예비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카푸스에게 희망을 실어 주려 했다. 내부의 예술혼을 믿으라, 인내심을 지녀라, 다른 이의 평가에 주눅 들지 말라 등등. 릴케는 고독이라는 슬픔을 견뎌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시인이라면, 더 나아가 예술가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고독과 같은 고통이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ㅡ타부키가 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을 인용하며 쓴 바와 같이ㅡ고통과 불행은 위대한 예술가뿐만 아니라 보잘것없는 예술가도 경험하는 것이다. 릴케는 예비 시인에게 그저 예술가가 되는 길을 말했다. 하지만 예비 시인은 그 길을 위대함과 연결 짓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산상수훈을 듣는 우리들도 대개 같은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2."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어떤 의견..
2019.10.14 00:36
생각이라는 말벌
-
내 바람과 상관없이 그건 아이의 운명에 달려 있다
아이를 양육하는 방식에 관한 우리의 완고한 측면들 여기, 슬픔에 빠진 한 남자가 있다. 전원주택을 짓기에 앞서 지하수를 파려던 그는 값비싼 돈을 치르는 대신 다우징을 이용해 지하수를 찾으려다가 난관에 부딪혔다. "아, 나는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을까!"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운명에 눈물짓는다. 곧 그의 친구가 도움을 주고자 찾아온다. 친구는 사려 깊은 태도로 지하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위로한다. 그는 문득 기운을 회복한다. "그래, 맞아. 겨우 이런 거로 좌절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는 다우징을 다시 잡았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다우징을 거꾸로 잡고 있었던 것 아닌가. 그는 지하수가 솟구쳐 오르는 상상을 하며 웃음을 흘렸다. 친구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에 안도를 느끼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2022.01.16 23:28 -
결혼은 왜 증오의 대상인가
1.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는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근간이라고 믿고 있는 투표권에도 여러 제한을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 나이는 만 40세이고 국회의원 피선거권도 만 25세 이상이다. 작년 총선부터 만 18세 이상이면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만 19세부터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일종의 제한이다. 이런 제한이 생기는 이유는 그런 제한을 가하지 않을 경우 미성숙한 자들이 잘못된 판단으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고 믿기기 때문이다. 투표권 제한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탄생부터 자신을 성숙한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것이어서 새삼스럽지는 않다. 고대 아테네는 물론 근대에도 여성은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판단..
2021.12.17 22:19
브런치북
-
일단 들어보세요
얼마 전 검도를 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큰 손해를 보고 말았다. 비싼 가격을 주고 산 죽도, 그러니까 검도를 할 때 사용하는 대나무로 만든 무기가 운동을 하던 중 모두 부러져버린 것이다. 보통의 것보다 두 배는 더 비싸게 주고 산 죽도가 구매한 지 한 달 만에 못 쓰게 되어버리자 난 큰 상심에 빠졌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본 결과, 죽도에 기름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다. 죽도에 바르는 죽도유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바르면 죽도를 오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죽도유를 인터넷으로 구매한 뒤 죽도에 발라보았는데, 과연 죽도에서 영롱한 빛이 나기 시작하는 것이 이젠 죽도를 몇 년은 너끈히 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마침 그때 나와 똑같은 고민에 빠져..
2020.12.04 17:50 -
당신은 우유부단한 성격입니다
저 자신과 상대방의 속마음을 알고 싶다는 근원적 욕망은 그 기원만큼이나 복잡하고 난해하다. 지난 세기의 점성술과 수상술, 풍수지리학과 사주명리학, 관상학과 골상학은 그런 욕망에 미래의 예언을 더하여 우리의 불가해한 의문에 답해 왔다. 보이저호가 태양계 너머를 탐험하고 있는 오늘날엔 IT 기술을 접목한 성격 진단 프로그램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승리한 이후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고 우리가 노동에서 벗어나 더 많은 여가를 누릴수록 강화되었으니, 마르크스가 에서 주장한 자본의 자기 증식, 다시 말해 잉여 가치에 오염된 삶을 살고 있는 나 역시 그런 욕망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IT 기술의 축복이 이 땅에 퍼지기 전엔 그 비밀 의식에 접근하..
2020.12.04 17:46
우아하고 감상적인 산책로
-
익숙한 길
바다를 접한 한적한 동네
1.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바다 말고는 볼 게 없는 동네라고 말한다. 그런데 컵에 물이 절반밖에 없다는 건 곧 물이 절반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바다밖에 없다는 세간의 평가를, 바다가 너무 멋져서 다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동네라고 바꾸어 말해야겠다. 이곳은 해변 바로 앞에 조성된 택지지구라서 아파트에서 왕복 2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해변이 나온다. 그래서 유난히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잘 보면 바다만 있는 건 아니다. 원주민의 배가 오가는 작은 항구도 있고 해변에서 조금 내려가면 주전항이라는 제법 큰 항구도 있다. 택지 내에 카페거리도 있다. 택지사업으로 조성된 곳이라 길도 반듯하고 건물들의 모양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지붕 색깔과 모양에도 통일성이 있다. 오래된 어촌 마을을 ..
-
익숙한 길
이게 몬차식 리소토라고?
몬차는 밀라노의 동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다. 밀라노와의 거리는 꽤 가깝다. 서울로 치면 김포, 광명, 구리시가 그 정도 떨어져 있는데, 바로 이 도시의 리소토를 두고 '리소토 알라 몬체즈', 다시 말해 몬차식 리소토라고 부른다. 몬차식 리소토는 몬차 지방의 전통 소시지를 넣어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몬차 소시지를 구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내가 만든 이 리소토에 몬차라는 이름을 붙이면 몬차 주민들, 아니 이탈리아 주민들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 "이건 몬차식 리소토가 아니라 그냥 소시지 리소토잖아!" 맞는 말씀이다. 그래도 밀라노식 리소토와는 다르게 상대적으로 하얀색을 유지하고자 했다. 밀라노식 리소토는 사프란을 넣어 노란색을 띠지만 난 넣지 않아서 색이 전반적으로 하얗다. 또 골수도 넣지 않았다. 몬..
나침반과 지도
-
나침반과 지도
이번에도 의사는 내게 항생제를 처방했다
1. 난 약을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유는 부작용 때문이다. 거의 모든 약이 인체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의약품은 복용 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고지해야만 한다. 내가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약을 먹는 경우는 부작용보다 당장의 고통 해결이 더 시급할 때이다. 때때로 부작용이 두려워 약을 아예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겐 집단통계적 증거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심리적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미국 FDA는 항우울제에 다음과 같은 블랙박스 경고문을 추가하도록 하였고, 그 때문에 우울증을 치료하고자 항우울제를 찾던 사람들은 복용을 주저하게 되었다. "어린이, 청소년, 젊은 성인이 항우울제를 복용할 경우 자살 사고 및 자살 시도 횟수가 증가할 수..
-
나침반과 지도
손가락을 칼에 베이다
빵칼에 찔렸다. 여태껏 수십 년간 요리하면서 단 한 번도 식칼에 베여본 적이 없었는데 도루코 면도칼을 붙여 만든 빵칼에 손가락 피부가 찔려버렸다. 멋지게 부풀어 오른 빵 반죽에 칼집을 내려고 빵칼을 꺼냈고, 그 빵칼에 둘러놓은 키친타월을 벗겨내려다가 순식간에 찔려버렸다. 서둘러 살펴보니 약 1.5cm의 길이의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얼른 손가락 마디를 움직여 보았다. 찔린 위치가 펴는 힘줄에 가까워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우선 이에 안도했다. 힘줄을 다치면 재활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다. 그 후 다친 손가락 주변을 만져 감각을 확인해 보았다. 감각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신경도 다치지 않은 듯했다. 찔린 위치상 신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