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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접한 한적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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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사람들은 이곳을 바다 말고는 볼 게 없는 동네라고 말한다. 그런데 컵에 물이 절반밖에 없다는 건 곧 물이 절반이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바다밖에 없다는 세간의 평가를, 바다가 너무 멋져서 다른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동네라고 바꾸어 말해야겠다. 이곳은 해변 바로 앞에 조성된 택지지구라서 아파트에서 왕복 2차선 도로만 건너면 바로 해변이 나온다. 그래서 유난히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잘 보면 바다만 있는 건 아니다. 원주민의 배가 오가는 작은 항구도 있고 해변에서 조금 내려가면 주전항이라는 제법 큰 항구도 있다. 택지 내에 카페거리도 있다. 택지사업으로 조성된 곳이라 길도 반듯하고 건물들의 모양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다. 지붕 색깔과 모양에도 통일성이 있다. 오래된 어촌 마을을 내려다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예정되어 있던 아파트들도 모두 들어섰고 4성급 호텔도 들어왔다. 


하지만 울산 내에서도 촌이라는 평가를 피하지 못하고 있다. 택지를 조성해 개발한 곳이지만 상가는 아직도 공실이 많고 풀로 뒤덮인 빈 땅도 상당하다. 다른 대부분의 택지지구와 혁신도시도 공실과 휑한 주택지로 울상을 짓고 있으니 꼭 이곳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구도심 입장에서는 커다란 단점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대형 마트나 병원 같은 기반 시설이 부족한 편이어서 시내를 나가야 할 때가 많다. 그런데 울산 시내로 나가는 버스도 몇 대 없고 그나마도 자주 오지 않는 데다가 여러 동네를 거쳐서 가는 통에 시내까지 나가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현대자동차에서 추진하기로 했던 자동차박물관은 보류되었고 롯데건설에서 추진했던 리조트 사업은 반쯤 진행되다가 멈춰 섰다. 최근 뽀로로 테마파크가 분양을 시작했는데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의 평가는 박하다. 다시, 바다 말고는 볼 게 없는 동네라는 말이 나온다. 아무래도 도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도 이곳이 남부럽지 않은 관광도시가 되길 꿈꾸고 있다. 



2.

그렇다고 상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잘 보면 바다만 있는 건 아니다.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인데, 아주 가까운 곳에 주상절리가 있다. 이곳의 강동화암주상절리는 규모가 제주도의 대포주상절리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유명세도 경주의 양남주상절리에 밀리지만 제주도와 경주의 주상절리와는 달리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직접 올라가 볼 수도 있다. 주상절리를 자세히 관찰하기에는 더없이 좋다. 홍보만 잘하면 충분히 유명 관광지로 키울 수 있을 듯한데 아직은 버려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강동화암주상절리 위에 올라가 있는 나. 2019. 6. 3.



역시 규모가 작긴 하지만 유적지도 있다. 아내가 아이와 함께 산책하러 나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말을 듣고 나도 가보았는데 규모는 작았지만 나름 흥미로운 데가 있었다. 이곳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발굴되었다고 하니 상당히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듯하다. 돌널무덤 같은 무덤지도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바닷가에서 생활하던 청동기인들의 무덤이었거나, 바다를 유독 좋아했던 사람의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싶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곳에서 저승에서의 삶이 복되기를 기원하지 않았을까. 아쉽게도 안내판엔 자세한 설명이 없었다. 


이 산하동 유적지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동해안 대부분이 그렇듯, 이곳도 해변 서쪽으로 산맥이 지나가고 있어 해안가 주변은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바다를 내려다보기에는 더없이 좋다. 


산하동 유적. 2019. 8.31.



어딜 가나 똑같은 체인점이 아닌 이곳만의 카페도 즐길 거리가 될 수 있다. 인근에 '더 브라운'이라는 상호의 카페가 있는데 인테리어가 깔끔하고 식탁의 수와 간격이 적당하여 필요 이상으로 붐비지 않는다. 음식도 1만 원 대로 비싼 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껏 여러 카페와 식당을 돌아다녔는데 아기 식탁 의자에 실리콘 덮개를 씌운 곳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아내는 그곳이 중년 부부와 그 아들이 운영하는 카페인 것 같다고 했다. 어찌 아느냐고 물으니, 계산대에 있던 젊은 남자가 주방에서 요리하고 있던 중년의 부부를 향해 "서빙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이 맞을 테다. 한국에서 나이 든 사람에게 예사말을 쓰는 건 가족 외에는 보기 힘드니까. 게다가 이 카페는ㅡ'서빙은 내가 알아서 할게'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ㅡ다른 카페와는 달리 주문한 음식을 직접 가져다준다. 여러모로 편리한 곳이다. 처음 이 브런치 카페에 왔을 때 아내는 디저트 진열대에 다쿠아즈가 있다며 보라고 일러주었다. 전날 내가 다쿠아즈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언질을 준 것일 테지만, 다쿠아즈가 있는 카페가 그리 흔하지는 않다. 카페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수평선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이 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카페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 평범한 피자집이나 초라한 국수 가게마저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만큼은 어디에 놓아도 뒤처지지 않는다. 


피자를 판매하는 카페. 2020. 2.16.



향토 음식점도 많다. 그중에는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곳도 있는데, 중세 유럽식으로 외관을 꾸민 한 가게는 입구 옆에 녹슨 대포를 두었고 지붕에는 자유의 여신상을 올렸다. 그런데 판매하는 음식은 놀랍게도 참가자미탕이었다.



3.

무엇보다 바다는 그때그때 달라서 아무리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창문을 활짝 열어두면 들리는 파도 소리도 장관이다. 주위가 시끄러울 땐 잘 들리지 않지만 조용할 때 창을 열어두면 파도 소리가 들린다. 내가 술을 좋아했다면 틀림없이 그 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한잔했을 것이다. 요즘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행 중이라 사람이 거의 없을 때를 골라 해변에 나간다. 밖으로 나가기 어려울 땐 창문을 통해서나마 탁 트인 바다를 감상할 수 있으니 이런 시국에 참 다행히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거의 전부다. 그래서 여전히 어느 관점에선 바다 말고는 볼 게 없는 동네로 보인다. 하지만 적어도 난 바다만으로도 충분했다. 살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바다를 내려다본 적이 없다. 값비싼 숙소에 머물며 잠깐 바다를 내려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건 여유 있는 눈으로 바다를 내려볼 때만 받을 수 있는 인상이다. 또 평생을 바다에서 보내야만 하는 사람은 받을 수 없는 인상이기도 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유한성, 그 유한성의 인식. 그것이 바다에, 이곳에 쉽게 지워지지 않을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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