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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담화를 이해하기

생각이라는 말벌/2020년대

by solutus 2021. 1. 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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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부산의 한 음식점에서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먹방 BJ를 몰래 험담한 일을 두고 인터넷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이 논란 중 음식점 측을 옹호하는 입장, 즉 험담을 옹호하는 측의 주장이 내 주의를 끌었다. 이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선 나라님도 욕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음식점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던 BJ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선 나라님도 욕할 수 있다는 대전제는 생각해 볼 거리를 던진다. 이 대전제는ㅡ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다른 이를 욕해도 되는지에 대한 윤리적 의문은 차치하고ㅡ하나의 중요한 조건을 달고 있다. '아무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무엇보다 나라님 앞에서 나라님을 욕하면 리어왕의 딸들처럼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음식점 측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음식점 관계자들이 아무도 듣지 않는 곳에서 손님을 험담했으니 문제 될 게 없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있다면 음식점 사장과 종업원들 모르게 녹음을 하고 있던 BJ가 오히려 문제라고도 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비록 고전적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충고를 되새겨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따라서 험담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를 따져보면 화살의 방향이 명확해 보인다. 그런데 모든 것에 상대성을 적용하는 상대주의는 이런 식의 평가를 거부한다. 음식점의 험담가들을 옹호하는 측은 그들이 아무도 듣지 않을 거라 '믿은' 곳에서 험담을 주고받았으니 그들의 행동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이런 이의제기는 오늘날 '뒷담화'를 바라보는 일부(실은 상당수) 네티즌들의 시각을 잘 드러낸다. 들키지만 않으면 험담은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말이다. 오늘날 인터넷 댓글란이 인종주의자와 근본주의자 들의 야유로 가득 차게 된 이유는 '들키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나라님을 욕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 보자. 사실 문제는 그들이 험담하는 장소에 나라님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가정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우리의 오랜 속담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잊은 게 분명하다. 이 험담가들은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인터넷 댓글과 SNS에 험담을 남기면서도 험담의 대상자가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자신들끼리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군다. 그러다가 그 추잡한 대화를 당사자가 보게 되면 읽을 줄 몰랐다고 발뺌한다. 더 대담하게는 자신들이 험담하는 걸 안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일부러' 보았느냐며 따지기까지 한다.

일기장에 친구의 험담을 늘어놓고 싶다면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잘 보관해야 한다. '일기장'이라는 제목을 달아두거나(사적 내용이 담겨 있으니 주의하라는 강력한 알림과 경고), '일반 물리학'과 같은 지루한 표식으로 위장하고(타인의 일기장이 일으키곤 하는 부도덕한 유혹 예방), 필요하다면 잠금장치를 단 뒤 서랍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어야 한다. 친구 험담을 가득 늘어놓은 노트를 아무런 표시도 해놓지 않은 채 반 친구들이 수시로 돌아다니는 교실 책상 위에 올려두고 오래 자리를 비우면서 아무도 자신의 비밀을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모한 짓이다. 만약 누가 어떤 우연이나 사고로 일기장 속 험담을 읽게 되었다면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일부러 보게 하려고 거기에 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포함해서)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엔 부적절할 수 있는 비밀을 부주의하게 다뤘다는 반성보다는 "왜 내 노트를 마음대로 보았느냐"라는 반박이 이어진다. 이런 반박은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현명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은밀한 행위를ㅡ서로간의 합의 하에ㅡ촬영할 수 있지만, 그런 촬영물을 오직 그 둘만 볼 수 있는 비밀스러운 장소에 보관하거나 보고 난 뒤 곧장 삭제해야지, 공용 컴퓨터의 바탕화면에 띄워두었다가 후회해 봐야 소용없기 때문이다. 명절에 집을 찾아온 어린 조카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다가 친인척들 앞에서 그들만의 은밀한 행위를 노출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해야 함이 마땅하다. 

이처럼 '아무도 없는 곳'이란 대전제는 결코 쉽게 만들어지지 않기에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라님을 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곳에 정말 아무도 없는지, 향후 발각될 위험은 없는지, 나와 험담을 주고받은 자가 나중에 비밀을 퍼뜨릴 위험은 없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호한 방향으로 흐른다. 이제 우리 일부는 그 아이가 잘못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부주의한 험담은 문제 삼지 않는다. 아무리 우연이더라도 남의 물건에 손댄 것 자체가 잘못이니 그것부터 따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따라서 오늘날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가 주연한 <노팅힐>을 다시 방영한다면 각본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그 영화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어떤 일행이 자신의 뒷담화(정확히는 성희롱)를 늘어놓는 걸 우연히 듣게 되었다. 뒷담화를 즐기며 웃던 사람들은 줄리아 로버츠가 눈앞에 나타나 "내 뒷담화 하는 걸 이해한다"라고 말했을 때 당황한 제스처와 함께 미안함이 담긴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노팅힐> 험담가들은 하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줄리아 로버츠가, 험담가들의 뒷자리에 앉아 험담을 쭉 듣고 있었던 줄리아 로버츠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줄리아 로버츠가 일부러 숨어서 엿들었으며 그걸 빌미로 한몫 챙기려 했던 것 아니었느냐는 비웃음과 함께. 이제 우리는 줄리아 로버츠가 아니라, 줄리아가 갑자기 나타나 너무나도 당황했을 그 험담가들에게 안타까운 연민의 감정을 실어 보낸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처해 있는 불유쾌한 진실을 직시하게끔 해준다. "똥을 먹어라, 수백만의 파리들이 먹고 있다"라는 광고 카피가 암시하는 뒷담화의 본질 말이다. '똥'이라는 단어가 거북한 분들을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들 각각은 자신의 문화가 그에게 가르친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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