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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의사는 내게 항생제를 처방했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11. 24. 18:30

본문

1.
난 약을 꼭 필요한 상황에서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유는 부작용 때문이다. 거의 모든 약이 인체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따라서 모든 의약품은 복용 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고지해야만 한다. 내가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약을 먹는 경우는 부작용보다 당장의 고통 해결이 더 시급할 때이다.

때때로 부작용이 두려워 약을 아예 먹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에겐 집단통계적 증거에 잘 대처하지 못하는 심리적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미국 FDA는 항우울제에 다음과 같은 블랙박스 경고문을 추가하도록 하였고, 그 때문에 우울증을 치료하고자 항우울제를 찾던 사람들은 복용을 주저하게 되었다.

"어린이, 청소년, 젊은 성인이 항우울제를 복용할 경우 자살 사고 및 자살 시도 횟수가 증가할 수 있다."

항우울제를 먹으면 오히려 자살 가능성이 커진다니, 당연히 복용을 꺼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청소년에게 처방하는 항우울제가 논란이었는데, 문제는 이런 경고문 때문에 적절한 우울증 치료가 필요한 환자마저 항우울제 복용을 거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는ㅡ집단통계적 증거에 따라ㅡ해당 경고 덕분에 위험에서 벗어나는 환자보다는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환자가 더 많을 거라고 우려했고 그런 염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안아키'라는 단체가 나타나 적절한 치료마저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었다. 비만인 중년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심장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네 배나 높다고 경고하면 살을 빼려는 강박에 빠질 수 있다. 네 배 높아진 그 확률이 5%에 불과하다고 말해줘도 두려움이 잘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약품에 동봉되어 있는 부작용 설명서를 읽고 있으면 약이 오히려 우리를 죽일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움베르토 에코가 지적했던 것처럼 부작용 설명문은 때론 지나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설명이 지나치다는 이유로 부작용을 그저 지나칠 순 없는 노릇이다. 집단통계적 증거에 익숙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이유로 약을 조심스럽게 대하지만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는다. 결국 확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작은 확률에 걸려들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때 아내는 내가 감기로 고생하면서도 끝내 약을 안 먹는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하곤 했다. 난 지금도 감기약을 먹으면 꽤 높은 확률로 기관지 천식이 나타나는데 당시 아내는 그걸 몰랐다. 감기보다 기관지 천식이 상대적으로 덜 고통스럽다면 감기약을 먹는 게 나을 수도 있지만 천식이 한 번 나타나면 감기에 걸린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난 심한 두통 등으로 고생하는 게 아니면 감기약을 먹지 않는다. 역시 가장 좋은 건 애초에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약을 먹어도 부작용이 없다면, 특정 물질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없다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천운을 누리는 셈이다.


2.
난 지금 칼에 베인 상처 때문에 항생제를 복용하고 있다. 항생제 역시 확률적으로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안타깝게도 이 부작용에 또 '당첨'되고 말았다. 내가 겪고 있는 부작용은 항생제 '크라부틴정'이 일으키는 것으로 바로 설사다. 설사는ㅡ내가 복용한 항생제 계열의 경우ㅡ약 11%가 겪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는데 내가 그 11%에 '당첨'된 것이다.

크라부틴은 아목시실린(amoxicillin)과 클라불란산(clavulanate)을 배합하여 만든 '페니실린계+베타-락타마아제 억제제'로, 내가 혹시 모를 감염을 걱정했던 황색포도상구균을 주요 표적으로 삼는 경구용 항생제이다. 문제는 이게 황색포도상구균뿐만 아니라 대장의 유익한 균까지 죽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 때문에 항생제 복용 이후 지속적으로 설사가 나타나고 있을 테다.

그런데 항생제 복용 전까지 내겐 세균 감염의 아무런 징후가 없었다. 아무런 증세가 없는데 꼭 항생제를 복용해야 할까? 상처 부위를 생리 식염수로 세척한 뒤 피고름을 뽑아내고 소독용 에탄올과 포비돈을 바르고 나서 붕대로 묶어두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여러 의문이 들었지만 난 의사의 결정을 따랐다. 전문의원에서 항생제 남용이 가장 빈번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봉합 수술 이후 발생할 수 있는 '혹시 모를' 항생제의 기능 때문에 며칠간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 다음번 방문했을 때 의사는 또 똑같은 처방전을 주었다. 항생제 크라부틴정을 3일간 또 복용하라는 것이었다. 난 여전히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상처는 잘 아물고 있었고 세균성 감염의 의심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항생제 처방은 원칙적으로 세균 감염이 확인된 경우에 해야 한다. 그런데 왜 계속 항생제 처방을 한단 말인가? 난 그런 질문 대신, 현재 겪고 있는 항생제로 인한 부작용을 이야기했다. 지금 그 항생제 때문에 설사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러자 의사는 간호조무사에게 경구약 대신 항생제 주사를 놔주라고 했다. 아마 크라부틴과는 화학구조가 다른 주사제였겠지만 어쨌거나 결국 또 항생제였다. 그런데 정말 필요한 일일까? 깨끗해 '보이는' 칼에 1.5cm 정도 베인 것뿐으로, 소독을 잘하였고 상처와 다른 부위에 아무런 증상이 없는데도 항생제를 일주일 넘게 먹으라고 권유하면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항생제 사용량이 제일 많은 걸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당연히 이유는 있을 것이다. 우선 너무 빨리 항생제 처방을 중단할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내성의 방지이다. 내성을 막으려면 일정 기간 항생제를 투여해야 한다. 이미 거의 모든 황색포도상구균 계통의 박테리아가 페니실린과 앰피실린 계열의 항생제에 내성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이땐 한 번 발생한 부작용을 완화할 수 있는 항생제를 써야 한다. 나로서는 의사가 주사로 투약하라고 지시한 항생제가 어떤 종류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의사가 어련히 잘했으리라고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로는 감염 위험이 아주 높거나, 감염 위험은 낮지만 일단 감염이 발생하면 심각한 결과가 예상될 때 하는 예방적 차원의 투약을 들 수 있다. 내가 그런 경우에 속했을까? 겉에서 봤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의사는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어떤 문제, 예를 들어 피부 안쪽에서 높은 확률로 농양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칼로 인해 내 피부 장벽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병원균이 그곳으로 침투하는 건 쉬운 일이었다. 따라서 황색포도상구균이나 화농연쇄상구균이 침투하여 농가진이나 봉와직염을 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상처가 악화되었을 때 받게 될 항의를 염려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성 부작용이건 뭐건 간에 그건 다소 훗날의 일이니 일단 세균 감염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항생제를 주는 것이다. 물론 이건 추측이다. 난 그의 속내를 알지 못한다. 여기에 아주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날의 관성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박테리아는 저항하고, 의사는 그 저항에 여러 가지 항생제를 섞고 항생제 용량을 늘리며, 박테리아는 그에 또 저항한다. 계속되는 반복. 어쨌거나 하릴없이 항생제 주사를 맞았다. 수십 년간 진료해온 전문의의 말을 따르지 않을 방도는 없었다.

엉덩이에 주사를 한 대 맞은 뒤 욱신거리는 고통에 절뚝거리며 원무과로 걸어갔다. 이미 벌어진 일을 이제 와 되돌릴 수는 없다. 내 실수가 1차 원인이었으니 누굴 탓하겠는가.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고, 운동을 충분히 하며, 중독성이 있는 나쁜 습관을 피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ㅡ지금은 그게 중요하다.

"그래서 아이들은 항생제 먹으면 유산균을 먹이기도 한데. 항생제 때문에 대장균이 죽으니까 말이야."

병원을 나서는데 아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항생제 치료가 끝난 후에 일부러 프로바이오틱스 처방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물론 항생제 처방 중에 프로바이오틱스를 섭취하는 건 주의해야 한다. 나도 다 나으면 요구르트를 하나 먹어볼 요량이다.

 


* 참고자료
한국병원약사회 "항생제 부작용 예방 및 관리 방안 연구 보고서" (2018) 
매리언 켄들 지음, 이성호 최돈찬 옮김 <세포전쟁> (궁리, 2016)
키이스 스타노비치 지음, 신현정 옮김 <심리학의 오해> (혜안, 2013) 358~359쪽
이정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검은 상자 속 항우울제" (정신의학신문, 2018. 9.13.)
백정화 치의학대학원 교수 "치과에서 항생제 치료 시 고려할 사항" (대한치과의사협회지 제51권 3호 2013. 2.25.)
원종혁 기자 "FDA 항우울제 블랙박스 경고문 삽입 10년…효과는" (메디칼 업저버, 2014.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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