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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논의 화살. 르네 마그리트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4. 12. 27.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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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면 가운데에 거대한 돌이 떠 있고 그 위에 그믐달, 그 아래에 바다가 보인다. 그믐달이 떠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쪽이 동쪽이며 아직 동이 트기 전임을 알 수 있다. 수평선으로 향할수록 밝아지는 것 역시 저 거대한 돌덩어리 아래쪽에서 곧 해가 떠오를 것을 암시하는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바다 위쪽으로는 많은 구름들이 떠 있는데 그 모습이 돌덩어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눈에 쉽게 보이는 이 정도의 모습을 가지고도 감상자는 마음껏 상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 붕 "떠있는" 바위를 보고, 비평가들이 굳이 구분해 넣은 '석기 시대'라는 용어를 생각해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공중 정원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며 종교와 연관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그리트의 그림은 역시 그가 지은 그림의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그림의 제목은 "제논의 화살"인데, 이것이 제논의 역설 중에서도 '화살의 역설'을 가리키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화살의 역설은, 날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살이 사실은 정지한 상태라고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제논이 자신의 스승인 파르메니데스의 불변에 관한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제시한 것으로, 무한에 관한 역설이다.

 

이쯤에서 보면 저 돌이 다르게 보인다. 마그리트는 일부 비평가들이 '석기 시대'라는 이름을 따로 붙일 정도로 저런 돌이 등장하는 그림을 자주 그렸는데, 이때 모두들 그 돌을 "떠 있다"고들 묘사했다. 아무리 봐도 저 돌은 정적으로 공중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다. 비단 이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그림들에서도 그렇다. 그런데 이 그림에 '제논의 화살'이라는 단어를 붙이자 다른 일이 벌어진다. 실은 이 돌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움직이는 방향은 알 수 없다. 화살(돌)을 날린 수평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중력에 이끌려 바다로 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마치 제논의 역설에 나오는 것처럼---한 순간에 이 돌은 멈춰있는 셈이고, 어쩌면 마그리트는 바로 그 순간을 잡아내어 이 장면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돌이 화살처럼 보이는가? 저 위의 달은 활시위처럼 보이는가? 돌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정지해있을 뿐인가? 돌에 붙잡혀버린 시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이름 하나 때문에. 거대한 돌에 붙여진 이름이 갑작스럽게 가하는 낯섬과 수수께끼. 그것이 마그리트의 그림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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