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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네 기사들. 뒤러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3. 6. 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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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위키피디아

 

르네상스 시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작품인 요한계시록의 네 기사들이다. '요한계시록의 네 기사들'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기사는 보통 정의의 상징처럼 그려지기 때문에---선한 인물들일 것 같은데 이곳의 기사들은 정반대의 존재들이다. 이 목판화는 요한계시록의 제6장에 나오는 일곱 봉인 중 첫째 봉인부터 넷째 봉인을 열었을 때 뛰쳐나오는 기사들을 새긴 것으로, 그림 아래쪽부터 각각 낫을 든 죽음, 저울을 든 기근, 칼을 든 전쟁, 활을 든 역병(어떤 곳에서는 역병이 아니라 '정복자'라고 말하고 있다)이다. 죽음의 왼쪽 뒤에는 하데스가 입을 벌린 채 따라오고 있다. 한글판 개역성경전서(1996년, 185판)는 이 하데스를 '음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지옥이 아니라 죽은 자는 모두 거치게 되는 저승을 뜻한다(하데스도 마찬가지로 헬과는 다르다).

천사들의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악마들의 이미지 역시 강렬하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 목판화를 처음 보았을 때 강한 인상이 머릿속에 남았다. 이런 이미지들이 주는 것은 공포심인데, 이 공포심은 사람들을 어느 일관된 방향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원동력 중 하나임에 틀림없고 그것은 나의 관심을 끌곤 했다.

공포심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이끌려 가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 역시 우리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저 위에 날개를 날고 날아가는 천사도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양비론이나 허무주의에 쉽사리 빠지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이유는 알 수 없지만---우리가 공포를 마주했을 때 불안해지는 반면, 희망을 마주했을 때는 기분이 좋아진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당혹스러운 경우를 보게 되는데, 그건 누군가의 죽음이나 극도의 공포심에서 희열과 기쁨을 느낀다는 인물들을 보게 될 때이다. 그들은 마치 시체 썩는 냄새를 향기롭다고 말하는 사람들과도 같은데, 그럴 때면 까마귀란 온통 검은색이라고 생각했던 어느날 갑자기 흰 까마귀를 보게 되었을 때처럼 우리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검은 까마귀와 흰 까마귀의 문제는 까마귀가 모두 검다는 전제를 포기함으로써 쉽게 끝낼 수 있지만, 인간의 근본적 감성을 어긋나게 만드는 그런 희귀한 인물이 나타났을 때는 그렇게 쉽지가 않다. 그럴 때 우리가 즉각적으로 조치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을 정신질환을 다루는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예찬하고 폭력을 가하거나 당하면서 기쁨을 느끼는 속성이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고 과연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사를 조금만 되돌아보아도 폭력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그 폭력을 즐기는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렇다면 저 네 기사들은 아포칼립스의 순간에 나타나는, 인간이 아닌 악령이라기보다는 현세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흥미로운 사실은, 인간을 제물로 삼아 농락하고 역병을 뿌리며 가차없이 죽음의 낫을 휘두르는 존재들이, 그런 것들을 즐기는 존재들이 저 위나 아래에는 실존하는 것으로 인간 그리고 신이라는 존재가 확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모순된 속성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되고, 바로 그것에서 끊임없이, 결코 쉽게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기이하고 오묘한 존재가, 스스로를 천사라고, 악령이라고, 그리고 신의 피조물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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