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대상 독자는 평소 철학을 생소하거나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들로 보인다. 이 책은 철학자, 종교인들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반론을 다각적으로 살펴보기보다는 그들의 주요한 주장을 흥미있게 드러내는데 목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독자들은 이 책의 내용에 그리 만족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런 관점에서, 굳이 지적을 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먼저, 책에서 예시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산파술은 논리적 헛점이 있었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지적해주지 않았고, 반면에 그를 고소한 이들의 논변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음에도 조금도 정당화해주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반박이 항상 옳지만은 않았고 또 그를 고소한 사람들이 주장이 온전히 틀린 것만도 아니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해설이 없었기에 우리가 철학을 하기 위해 필요한 균형잡힌 시각을 제대로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불균형적인 시각은 마르크스 편에서 특히 심해지는데, 철학이라는 이름을 단 입문서가 한 쪽의 이론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 않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올바름'과 '정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두고 해설을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중 그 논점이 슬몃 사라져버려, 국가론에서 이야기하는 올바름과 정의가 무엇인지 다소 알기 어렵게 만들었다. 또 이데아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갑작스럽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길게 설명하여 비유가 크게 비약하고 있었다.
공자 편에서는 공자가 했던 주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그쳤다. 공자가 말했던 근본주의적 원칙을 현실의 세밀한 사건들에 적용하려고 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보편적 근본 윤리가 세밀한 삶에서 어떻게 동떨어져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은 어질게 살아야 하는 법이여.'라고 우리는 말하는데, 정작 '어질다는 것이 뭣이랍니까?'라고 묻지는 않는다.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는 제비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흥부의 마음,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주는 나뭇꾼의 마음이 바로 어진마음이다."(119~120쪽)
'어질다'는 개념이 누구나 알고 있는 쉬운 개념인 듯 표현하는 것은---철학이 물어야 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어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점에서---저자의 잘못된 가정이라 할 수 있다. 철학이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나무꾼을 생각하는 것 또한 어진 것이 아닌가? 왜 사슴을 생각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다. 철학이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윤리적 기준들(어질다는 것이 무엇인가)이 세밀한 부분에서 언제나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인데, 저자는 이 부분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편을 보자. 이 부분에서 저자 황광우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 뱀 같은 무리야, 누가 너희더러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하더냐? 너희를 벌하려 이 도끼가 준비되어 있다." // 끔찍한 독설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친 예수였지만 유대교 지도자를 향한 저주에서만큼은 한 치의 타협도 없다. (135쪽)"
예수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와 모순된 표현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의문이 갈 만한 내용을 적어놓았지만 저자는 그에 대한 이야기는 더 논하지 않는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오는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하루는 예수가 마르타라는 여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마르타는 예수를 접대하기 위해 부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런데 마르타의 동생인 마리아는 부엌일을 도와주지 않고 예수 곁에서 예수의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그래서 마르타가 예수에게 다가와 말한다.
"마르타: 이래도 되는 거에요? 나는 바빠 죽겠는데 동생은 손 하나 까딱 않고 있으니, 부엌으로 가 일 좀 하라고 일러주세요. / 예수: 마리아가 잘한 것이다. 그대로 두렴." (142쪽)
놀랍게도 저자 황광우는 위 일화를 단순히 마리아를 소개하는 용도로만 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화는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의문을 담고 있다. 왜 예수는 일을 돕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마리아가 '잘한 것'이라고 말했을까? 이것에 대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가 일상적인 일들(부엌일)보다는 가르침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고,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마르타가 자신의 일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마리아를 시기하였기에 마리아를 칭찬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는 또 다른 의견을 자신의 소설 속에서 피력하였는데,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관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퇴계 이황 편에 이르면 성리학의 이기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쓴다.
"이가 본이고 기는 말이요, 이는 선이고 기는 악이라는 쓸데없는 관념의 유희에 젖어들었다. 내가 먼저이고 너는 나중, 내가 주인이고 너는 손님, 나는 잘났고 너는 못났네, 비교 대립 차별하는 것은 천지 자연의 모습이 아니다."(159쪽)
저자의 그런 주장은 사실 잘 이해되지가 않는다. 성리학의 이기론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히 관념적이기 때문에 이본기말론과 같은 주장을 쓸데없는 관념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기 때문이다. 이본기말론이 쓸데없는 관념이라면 성리학 또한 쓸데없는 관념이 되어야 한다. 또 '내가 먼저이고 네가 나중'이라는 생각은 비교 대립 차별을 야기하는 불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것이 먼저였는가 하는 문제는 우주 만물의 생성 원리와 체계를 논리정연하게 수립하고자 했던 동서양 철학자들에게는 항상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굳이 이기론이 쓸데없는 관념의 유희에 젖어들어 비교 대립 차별로 이어졌다는 말을 했을까? 그건 아마도 성리학에서의 논쟁이 당쟁으로 이어졌던 조선 정치사의 아픈 면을 꼬집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만일 그런 의미였다면 철학의 사상을 정치에 이용한 정치인들을 지적해야지, 철학적 고민 자체를 쓸데없는 관념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철학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이 책의 목적이 철학 입문서라면 더욱 그렇다.
지금까지 이 책의 단점들을 쭉 늘어 놓았는데, 이렇게만 평하고 끝낸다면 이 책은 조금 억울할 수 있겠다. 제일 처음 적어 놓은 대로, 이 책은 입문서이기 때문에 위에 단점이라고 적은 것들에 대해 사실상 자세히 해설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에겐 명백히 의도한 독자층이 있기에 그에 해당하지 않는 독자가 자신의 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지 않다고 해서 혹평을 가할 수만은 없다.
따라서 그 독자층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여러 장점들을 지니고 있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먼저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게 쓰였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본 사람이 있다면 어려운 이론을 쉽게 풀어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철학에 대한 것이라면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일반적인 철학서와는 달리 철학자들의 이론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의 생활 태도나 됨됨이를 같이 이야기하여, 그들의 삶에서 본받을 만한 자세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도 특기할만 하다. 물론 그런 일화들은 철학과 거리가 멀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을 흥미있게 읽어 나가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입문서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일정 부분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쉬운 해설보다 더 큰 장점은 이 책이 동양 철학을 함께 다루었다는 점이다. 철학서 대부분이 서양 철학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입문서에서 적게나마 동양철학을 다루고 있다는 점은 고무적인 일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책이 철학 그 자체가 아니라 철학을 통한 사회 변화를 위해 쓰였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 말하는 철학은 지식과 윤리의 성립이나 만물의 생성 원리, 사물의 본질, 관념, 영원성에 관한 것이 아니다. 철학을 통해 올바른 사회, 올바른 정치, 올바른 국가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에 큰 목적이 있다. 저자가 뽑은 10인의 철학자도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선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현실과는 별 관련없어 보이는 이념들을 공부하다가 쉽게 흥미를 잃어버리는 것을 볼 때, 이렇게 철학과 사회 변화의 연계성을 보여주는 것은 철학하는 의의를 보여주는 데 긍정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자가 균형있는 시각을 유지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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