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철학자와 그 철학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과 영화와 같은 '소재'를 중심으로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다루는 소재에는 '오이디푸스 왕'이나 '햄릿' 같은 유명한 고전도 있고 '프랑켄슈타인'이나 '투명인간' 같은 SF 소설도 있다. '스타워즈'나 '로마의 휴일' 같은 영화 소재도 있으니, 평소 영화 관람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저자 김용석이 영화에서 어떻게 철학을 읽어내는지 관심있게 볼 만하다.
책 중반부터는 고대와 중세의 철학자들이 펴낸 책, 예를 들어 '크리톤', '향연', '명상록' 같은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기에 기존 철학서들과 구분되는 특별함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후반부의 내용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고전들이 내포하고 있는 철학적 의미들을 쉽고 짧게, 그렇지만 가볍지 않게 잘 다루고 있다(이렇게 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갈리아 전기'나 '범죄와 형벌',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소재에서 색다른 지적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책 전반부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일종의 문학평론이나 영화평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뒤 무엇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가?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그 방법들 중 하나를 배울 수 있다. 문학과 영화를 통해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는 것은 바로 이 책의 저자가 보여주는 그런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국 독후감을 쓴다는 것은 생각하는(철학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니,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저자가 자신의 사유의 힘을 키워내는 과정을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으며, 결국 그 힘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소설책이나 영화를 어떤 식으로 읽어내야 하는지, 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고민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일례로, 저자는 볼테르의 소설 '캉디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캉디드'를 읽어본 분이라면 자신이 그 책을 읽고 느낀 바와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종교를 믿든 이념과 사상을 추종하든 사람들이 '믿음'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볼테르의 경고를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 "노동은 우리를 커다란 세 가지 악, 곧 권태와 방탕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지요." 이 점에서 이 작품이 진정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낙천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맹신 때문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볼테르는, 그릇된 믿음은 각자 자신이 믿는 것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과열된 논쟁을 불러온다고 경고한다. (...) 맹신을 바탕으로 지나치게 설득하고자 하는 욕구는 궤변을 만들어낸다. 말하기에 바빠 생각할 겨를이 없어서, 생각에 따라 말이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말이 생각을 좀먹기 쉽다. 오히려 말이 생각을 조작하기에 이른다." 279쪽
'철학 정원'은 근래에 읽은 교양 철학서 중 가장 좋은 느낌을 받은 책이었다. 이 책이 더 깊은 독서를 향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몇 구절을 아래에 적어둔다.
오레스테스를 방면하기로 결정한 것은 죄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로써만 탕감되는 게 아니라, 합리적 판단으로써 '면죄'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법의 본질적 역할이 벌을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응징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면죄해줄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있음을 뜻한다. 면죄의 가능성이 우선이고, 처벌의 필연성이 차선이라는 것이다. (...) 한편 이것은, 법이 인간 세상에서 죄와 벌의 문제를 '일단락'짓지만,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 또한 의미한다. 83쪽
한편 오레스테스는 면죄받은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 앞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그러므로 면죄는 앞으로 그에게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해야 함을 지시하는 것이다. 84쪽
인간이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고, 최소한으로 필요한 만큼만 합리적으로 사건에 대처하는 상황에서 비극적 사건은 시작된다. 비극은 결국, 합리성의 필요충분조건 사이에서 최소한의 필요조건만을 붙들고 행동하는 인간의 삶을 놀리는 장치이다. 91쪽
이는 또한 상당수의 윤리적 사건은, 인간 본성에 대한 확신과 인간관계의 '분명함'에 근거하는 게 아니라 '미묘함'에 비추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일러준다. 98쪽
변신의 주제가 또한 어쩔 수 없이 정체성의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도 불변의 요소와 밀접하다. (...) 변신은 불변하는 정체를 더욱 의식하게 한다. 107쪽
이 비극은, 인간이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인간 스스로 불변의 구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준다. 곧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수많은 삶의 조건들을 절대화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친다. 114~115쪽
햄릿을 우유부단한 성격을 지닌 남자의 대명사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극 중에서 햄릿은 지나치게 분명해서 모순에 빠지는 사람이다. 햄릿의 사고가 망설임 없이 너무나 분명한 틀을 가졌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단호한 것 같으면서도 모호해진다. (...) 세계를 명확히 구분해서 이분법의 틀로 인식할 때, 누구에게든 선택과 결행은 어려워진다. 122쪽
"델포이에 있는 신탁의 주재자는 말하지 않고 감추지도 않으며, 신호를 보낼 뿐이다." 123쪽
어느날 저녁, 산초는 다른 사람들에게 돈키호테를 가리키며 그가 일명 '슬픈 얼굴의 기사'로 불린다고 소개한다. 돈키호테가 왜 자기를 그렇게 불렀냐고 묻자, 산초는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이 너무나 비통해 보여서 그랬다고 답한다. 128쪽
이 작품이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는, 지킬이 말한 "인간은 온전한 하나가 아니라, 온전한 둘이다"라는 명제에 그치지 않는다.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면, '인간은 온전한 여럿이다'라는 철학적 주제까지도 발견할 수 있으며 (...) 137쪽
반 헬싱은 설명한다. "그녀가 '살아있다(alive)'는 얘기가 아닐세. 그런 생각을 왜 하겠나? 그녀가 '죽지 않았다(Un-Dead)'는 얘기를 하려는 걸세." 156쪽
악은 '선'이라는 말, 즉 "좋아!(Good!)"라는 말을 매우 단호하게 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악한 자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좋다는 것 또한 확신한다. 악에게는 선과 악의 개념이 분명하다. (...) 하지만 선은 어떤가? 선과 악의 개념에서조차도 망설임이 있지 않은가? 174쪽
그는 정치가로서 망명하지 않고, 철학자로서 죽음을 택했다. 이는 진리 앞에서 법과 정치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곧 소크라테스는 의연히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법과 정치를 반성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사람과 세상을 반성하게 한 것이다. (...) 따라서 그가 크리톤과의 대화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자리에서도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마치 선언문처럼 자신의 철학정신을 대표하는 표현으로 내세웠을 리 없으며 (...) 224쪽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을 깊이 돌아볼 수 있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작품 속의 대화에서도 '덕을 가르칠 수 있는지 아닌지'라는 문제에 머무는 게 아니라, 가르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프로타고라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에 대해 스스로 얼마나 객관적이고 보편적이기 위해 진력하는지를 시험하면서, 그 시험 속에 자신까지도 깊이 참여시켰다. 242쪽
문학사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서구 최초의 문예비평서라고 한다. (...) <시학>하면 사람들은 저 유명한 '모방'과 '정화'라는 개념을 상기할 것이며, 고대 희랍 서시사와 비극에 대한 문학이론을 떠올린다. 245쪽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져야 하는데, 플롯, 성격, 언어 표현, 사고력, 시각적 장치,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사건들의 조직, 곧 플롯이 가장 중요하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을 모방하며 그에 따른 행복과 불행을 모방해서 표현한다. ......그러므로 사건들을 조직하는 것, 곧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무슨 일에서나 목적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 246쪽
여기서 키케로는 우정의 제일 법칙으로 "도의에 어긋나는 요구를 해서도 안 되고, 요구를 받더라도 들어주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252쪽
"아닌 게 아니라 우정보다 돈을 더 선호한다면 비열하다고 생각할 사람들도 없지는 않겠지만, 우정보다 관직과 정치적, 군사적 권력과 출세를 우선하지 않을 사람들을 찾기란 쉽지 않네. ......인간의 본성이 권력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하기 때문이라네. 그리고 누가 친구를 버리고 권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런 중대한 이유에서 친구를 버린 만큼 자기 과오가 잊혀지리라고 믿는다네. 그래서 관직에 있거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한 우정을 찾기란 매우 어려운 법이라네." 254~255쪽
키케로는 친구를 선택하고 우정을 유지하는 데 지혜로운 판단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수준 높은 이성적 능력을 요구한다. 그래서 친구 사이에서는 "사랑하고 나서 판단하지 말고, 판단하고 나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 말은 사랑과 우정을 구분하는 핵심이다. 255쪽
또한 "왜 그는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렇게 부자로 살아가는가? 왜 그는 재산을 경멸해야 한다면서도 재산을 갖고 있는가?" 같은 비판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꾸한다. "물론 그런 것들을 경멸하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이는 그런 것들을 갖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것들에 매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또한 의심할 여지없이 현인은 가난할 때보다 부자일 때 자기 마음을 계발할 수 있는 수단을 더 많이 갖지요. (...)" 세네카의 이런 변론에 대해 독자들은 흥미로운 설전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 261쪽
한편 글쓰기는, 몽테뉴의 경우처럼 자신의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글쓰기는 타인에게 자기를 노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은 어떤 형대로든 '자기 노출의 창'이다. (...) 글쓰기는 노출의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더욱 치열하게 자아 성찰을 거치게 된다. 바로 여기에 읽기와 쓰기의 철학적 의미가 있다. 275쪽
못말리는 팡글로스의 낙천주의 설명에 캉디드는 대답한다. "정말 멋진 말이군요. 하지만 이제 우리 정원을 경작해야지요." 282~283쪽
마키아벨리는 책 서두에서부터 "군주국에 대해서만 논하겠다"고 분명히 밝힌다. (...) 마키아벨리는 권모술수로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할 수밖에 없는 '군주국가와 군주의 현실은 이렇다'라고 보여주면서, 그런 현실에 바탕해서 '군주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 하지만 <군주론>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 마키아벨리가 '군주란 이렇다'라고 한 것을 '위정자란 이렇다'라고 보편화했다. 더 나아가 '정치란 이렇다'라고 해석하고 싶어했다. 302쪽
행위자의 의지를 유독 강조하는 말로, '마음먹기 달렸다'라는 표현이 있다. (...) 이 말은 일단 맞다. 무슨 일을 하려면 우선 마음부터 먹어야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단 마음을 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고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는다. (...) 더 부정적인 문제는, 마음은 단단히 먹지만 마음먹은 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거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에 더 큰 좌절에 빠진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매우 큰 문제점이 있을 수 있다. (...) 바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그 주장 말고는 다른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계속 마음먹기 달렸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계획을 이행하거나 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며 주어진 상황을 세밀하게 분석하려 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행위자의 의지를 강조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지 말고 믿게 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강력한 법률과 규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도 본질적으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하다 보면 법령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위법을 처벌하는 것 외의 다른 해결책들을 진지하게 탐구하지 않게 되기 쉽다. 312쪽
베카리아는 또한 계몽의 정신이 유럽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장족의 발전을 거두게 하기는 했지만, "형벌의 잔혹성과 형사 절차의 불규칙성을 연구하고 이에 맞서 싸운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 "형벌이 어떠한 경우에도 한 시민에 대한 일인 혹은 다수의 폭력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공개적이고 신속하며 꼭 필요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형벌은 주어진 상황 아래에서 될 수 있는 한 최소한이어야 하고, 범죄에 비례해야 하며, 성문법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범죄와 형벌>의 결어는 이 책이 어떻게 근대 '죄형법정주의의 선언서'가 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이 문장의 내용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직후에 국민의회에 의해 공포된 저 유명한 '인권선언' 제8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324쪽
형벌제도에 관한 베카리아의 입장은 한마디로 '인간은 수정을 해야 하는 존재'라는 철학에 근거한다. 그런데 사형은 수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배제한다. 죽은 자를 다시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형은 죄수가 교화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삭제한다. 그러므로 수정해야 하는 존재가 자신을 수정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수정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이처럼 사형제도의 이중적인 문제점에 주목하게 한다. 327~328쪽
그는 인간 문화가 얼마나 놀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탐구한다. (...)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 문화에서 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느낄 정도다. (...) / 놀이의 첫 번째 중요한 특성은 '자발적 행위'라는 점이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놀이는 이미 놀이가 아니다. 330쪽
"놀이는 자유라는 본질에 의해서만 자연의 필연적 진행 과정과 구분된다." 330쪽
놀이의 두 번째 특징은 '비일상적'이라는 점이다. (...) "막 재판을 시작하려는 재판관들은 법복과 가발을 씀으로써 곧 '일상적' 생활 밖으로 걸어 나온다." 330~331쪽
흥미로운 것은, 하위징아가 페어플레이 정신을 각종 경연이나 스포츠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전쟁과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분석한다. 전쟁이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경쟁자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놀이의 성격을 갖지만, 그렇지 않고 전쟁이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집단(...)에 대해 수행될 때"는 놀이의 특성을 완전히 잃고 참혹한 사태가 될 뿐이라고 한다. 331쪽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라고 자문하게 된다. 사실 하위징아는 '놀이하는 인간'을 논하면서, '놀지 않는 인간'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여가 활용이 일상적 의무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수많은 경쟁적 놀이에서 승부와 성취가 페어플레이보다 우선함으로써 놀이 그 자체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333쪽
하위징아가 인용하는 플라톤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러면 무엇이 바로 사는 방법인가? 삶을 놀이하면서 살아야 한다. 곧 어떤 경기를 하거나, 제사를 지내거나, 노래하고 춤추거나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은 신을 달랠 수 있고,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며,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334쪽
그의 사상을 좀 더 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지금까지 이 이론이 학문적으로 공헌한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매클루언이 본격적으로 '도구의 철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 "우리는 도구를 만든다. 그다음에는 도구가 우리를 만든다." (...) / 두 번째 공헌은 매체의 비매개적 성격을 암시했닫는 데 있다. 매체(media)는 인간관계를 매개(mediate)하지만, 인간과 매체 자신은 비매개적으로, 곧 즉각적(im-mediate)으로 밀착한다. 338쪽
"자유로운 사람이 죽음보다 적게 숙고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자유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해서가 아니라 삶에 대해 명상하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로 시작한다. 하지만 (...) 최근까지도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보다 죽음에 대해서 더욱 사색하고 고뇌해왔기 때문이다. 362쪽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이란 생명체도 물질로 환원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의혹이 그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인간도 물질이 아닐가?'라는 의문이다. 363쪽
인간이 별난 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은 자칫 인간의 존엄을 무시한다는이유로 비난받는 대상이 될 수 있다. (...) 하지만 (...)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을 자신만큼이나 존중할 줄 아는 계기가 되었다. 367쪽
흥미로운 것은 과학자만 동물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동물이 자신에게 친숙해진 과학자를 매우 진지하게 관찰한다는 것이다. '동물과 과학자의 상호 관찰'을 발견하는 것은 로렌츠의 책을 읽는 또 다른 재미이다. 372쪽
하이젠베르크에게 고대철학과 현대물리학 사이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며, 이 책 밑바탕에 깔려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불의 개념을 에너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때 (...) 현대 물리학의 관점이 고대 자연철학사상과 매우 가깝다는 설명은 설득력 있다. (...) 에너지는 항상 운동 상태에 있으며, 모든 변화의 근본 원인이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실체적 근원은 불이고 그것이 모든 변화의 원인이라고 한 바, 불을 에너지로 대체할 경우 그의 입장은 현대물리학의 해석에 매우 근접해 있다. 379쪽
그는 "(...) 과학이나 수학에서조차 모순성을 포함하는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일 기억해"두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면 "무한의 개념이 분석된다면, 그 자체로 모순이다. 그러나 실제로 무한의 개념 없이 수학의 주요 체계를 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순의 관계는 갈등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상보적 공존의 관계라는 것이다. (...) 동전의 앞면을 바로 보려면 뒷면을 부정해야(가려야) 하지만, 동전의 뒷면이 있어야 앞면 또한 존재할 수 있다. 383쪽
바이츠제커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의 위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종교적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세계로부터 우리에게 계시되고, 비밀에 의해 보호되며, 기적에 의해 확증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과학에 대해 우리 시대의 평범한 사람이 느끼는 정신적 상황은, 한 신앙인이 그에게 계시된 믿음에 대해 갖는 정신적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원자의 세계는 저 세상과, 그리고 수학적 공식은 전문가만 읽을 수 있고 평신도에게는 비밀로 남아 있는 저 종교적인 텍스트와 비교될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기적은 초인간적 힘의 선언이다. 종교적 믿음이 알려준, 겉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난 기적은 배고픈 자의 식사와 병자의 치유이며 알 수 없는 힘에 의한 인간 생활의 파괴였다. 기술화된 국가경제, 교통수단, 현대 의학 그리고 오늘날의 전쟁기술은 이와 같은 기적을 행한다." 401쪽
"우주를 점점 이해하면 할수록, 우주는 그만큼 또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성과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적어도 연구 그 자체에서 어떤 위안을 느낀다. ......우주를 이해하려믄 노력은 인간의 삶을 코미디보다 좀 더 나은 수준으로 높여주고 우리에게 비극의 아름다움을 가져다 주는 아주 드문 일 가운데 하나이다." 410쪽
유전자의 관점에서 생명체를 관찰함으로써 그가 도출해낸 "인간적인 교훈"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생물학적 본성 일부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417쪽
오늘날 과학을 비판할 때 환원주의는 대부분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환원주의가 복잡한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문제는 단순화가 아니라, 단순화의 성과를 유일한 답으로 삼는다는 데에 있다. 4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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