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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저, 이민아 역. (이후 2002) (1)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5. 3. 25.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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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일부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고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수전 손택의 입지를 확립시켜 준 예술 평론들---정확히 말하자면 그중에서도 1964년에 발표한 <'캠프'에 관한 단상>이 그 시작이겠지만---의 모음집이다. 그만큼 좋은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하겠다. 하지만 사실상 모든 대중 서평가들이 '감히' 논박하지 않는 이 칭찬 일색인 에세이에도 물음표를 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다.

 

그녀는 이 유명한 에세이에서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 보아달라고 호소한다. 그녀가 그렇게 강한 논조로 주장했어야 될 만큼 예술작품에 대한 무자비한 해석이 이루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주장대로 예술을 해석하는 작업은 불필요한가? 아니, 적어도 어느 분야에서 만큼은 해석을 자제해야 한다면, 그 주장은 정말 타당한 이유를 지녔는가?

 

'내용과 형식'이라는 예술비평의 이분법적 구분이 생소한 독자는 물론, 그런 구분을 당연시했던 독자들 역시 당황했을 것이다. 손택은 비평가를 포함한 상당수의 독자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위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해석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일상적으로 하는 행위였다. 우리는 어떤 것이 담고 있는 '의미'나 '내면'이 삶의 중요한 가치라고 배워왔고, 따라서 겉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그것이 안에 지닌 진실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했었다. 

 

가치 파악을 위한 우리의 이런 관점은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그대로 옮겨갔다. 즉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해석할 수 없는 작품을 진정한 예술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가령 흰 도화지 가운데 점을 찍은 작품이 수 억원의 가치가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아무 의미 없는, 나도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그림이 수 억의 가치가 있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기이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해석을 집어 넣어 적용한 뒤 그제서야 안심한다. 저 가치 없는 그림에 비싼 가격이 매겨진 이유는 어떤 재벌이 세금 포탈을 하기 위해 물밑 작업을 했기 때문이라는 식이다.

 

해석이 잘 안 되는 이상한 예술 작품을 보면 우리는 안절부절못한다. 저게 대체 뭐지? 난 저걸 보고 뭘 느껴야 하는 거지? 저게 어째서 예술이란 거지? 이때 해석이 나타나 그 작품이 지닌 의미를 설명해 주면 관객은 그제야 안정을 찾는다. "그렇군, 그런 뜻이 있었군, 그래서 예술이었군. 난 미처 그런 점을 보지 못했는데 이 평론가는 정말 대단해." 하지만 수전 손택의 생각에 그런 해석은 진실이 아니요, 해석자 본인이 생각일뿐이다. 즉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기에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이며,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그저 하나의 생각일 따름이다.

 

그런데 현실을 반영하는 작품들이 있지 않은가? 예를 들어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는 소설과 영화. 그런 작품들은 명백히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해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수전 손택은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을 알고 이미 다음과 같이 써 두었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이 해석되기를 의도했느냐 안 했으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정말로 카잔의 '전차'가 바로 자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러나, 이들의 작품이 지닌 가치는 필시 거기에 담긴 '의미'가 아닌, 어딘가 딴 데에서 찾아야 한다." (27~28쪽)

 

윌리엄 헌트의 <깨어나는 양심>처럼, 화가 자신이 일부러 온갖 도덕적 상징을 집어넣은 그림에 대해서도 손택은 아마 마찬가지의 주장을 할 것이다. 화가는 분명 그 자신이 의도적으로 그 그림에 도덕적 상징들을 배치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나는 양심>을 보았을 때 느껴야 하는 것, 의미를 둬야 하는 것은 그 그림에 담긴 도덕적 의미가 아니라 그 그림 자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획득하는 일이라고 손택은 주장할 것이다. 즉, 우리에게 작가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림이 우리를 어떻게 유혹하고 있느냐, 그 그림에서 우리가 무엇을 느꼈느냐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 내용이 상당히 강조되는 잠언시에서조차 내용이 아닌 형태의 유혹을 느낄 여지가 생기게 된다. 잠언시를 읽으면 우리는 잠언시가 전하고자 하는 그 내용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에게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는 능력이 있다면, 잠언시가 전하려는 그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도 (심하게는 그 시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쓰여 있어도) 그 시에서 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2.

손택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술을 지식과 논리로 해체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술은 감성적인 것이고, 당신을 이유도 모른 채 떨게 만드는 것이다. 즉,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다."(35쪽) 이 문장에는 예술이란 지적인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것에 가깝다는 손택의 주장이 들어있다. 우리는 이성의 관능적인 움직임과 모습에 매혹당하듯, 그렇게 예술에 매혹당하고 예술은 또 그렇게 매혹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의 유일한 임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 때문에 해석이 불필요할 수는 없다. 진정한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그저 예술인 척 하는 작품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실에서 해석없이 모든 작품들을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다. 물론 손택은 캠프와 키치 역시 (적어도 이 평론들을 쓴 시점에는) 예술로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엔 여전히 논란이 존재한다. 흰 도화지에 점 하나 찍은 것을 예술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취지의 무리들은 분명히, 그것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해석이 예술작품을 파괴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해석은 단순히 내용을 파헤치는 것 이외의 의도 또한 분명 지니고 있다. 바로 '참된' 예술작품의 갈구이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이 세계에 예술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니, 캠프를 포함한 많은 것들을 모두 예술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해보자. 그러나 우리(특히 비평가들)의 버릇, 즉 겉에 보이는 것이 아닌 숨겨진 내면에 삶의 궁극적 가치가 담겨있을 거라는 인식은 자꾸만 형식이 아닌 내용에 눈이 가게 만든다. 그들이 보기에 캠프나 키치가 예술일지는 모르겠으나 참되진 않다. 따라서 그런 작품들의 홍수는 예술의 위기를 부르는 것처럼 보인다. 예술의 가치가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때 예술을 구해줄 수 있는 것이 해석이다. 오직 참된 예술만이 해석될 가치를 지녔고, 그 해석은 그 작품이 왜 위대한지를 증명한다. 손택은 카프카에 대한 온갖 해석이 그를 난도질하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카프카의 소설에 그렇게 많은 해석이 가해지는 건 그의 소설이 그만큼 위대하기 때문이다. 작품을 내용으로만 분석하는 것은 분명 옳지 못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작품을 형식으로만 파악한 채 내용 분석을 경시하는 태도 역시 옳지 못하다.

 


3.

손택의 분노는 예술을 해석을 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분명 해석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그녀는, 작품의 내용에만 집중하여 예술을 해석하는 행위가 결국 예술작품을 자리에서 내쫒은 뒤 대신 비평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오만한 행동이 된다는 걸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술작품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이바지할 비평"(32쪽)을 찾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예술을 폭넓게 바라보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내용의 해석이 예술을 그 자리에서 내쫒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과거에 실제로 그런 적이 있다면,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다시 한번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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