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죄와 벌 - 도스토옙스키 (하서, 1994) (1)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5. 3. 20. 22:09

본문

죄와 벌에서 도스토옙스키가 표현하려고 하는 주제는 그 제목처럼 분명해 보인다. 죄란 무엇이며, 그 대가로 주어지는 벌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물음. 도스토옙스키는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이것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혹은 생각할 거리를) 조금씩 내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163~165쪽에 걸친 등장인물들의 철학적 대화를 보자.

 

루진: "내 의견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보다 많은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 세대를 관찰함으로써 보다 많은 것을 깨닫고 많은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 젊은이에게는 경솔에서 오는 정열도 있을 것이고  과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는 너그럽게 생각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 여태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해왔습니다만, 만일 내가 무턱대고 남을 사랑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 그 결과란 (...) 두 사람이 모두 알몸이 되고 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 그러나 과학은 (...) 우선 무엇보다 자기 하나를 사랑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이란 모든 개인의 이해관계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이리라, 이러거든요. (...) 그러니까 자기 개인을 위해서 획득한 이익은 곧 이류 전체의 이익이 되는 셈입니다." (163~165쪽)

 

라주미힌: "실제적 정신이란 그렇게 쉽사리 얻어지는 게 아니야. 하늘에서 거져 떨어지지 않는다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럭저럭 2백 년이나 모든 실제적 행동에서 동떨어져 있었단 말일세. (...) 그런 자기 도취에 빠진 자신만만한 이론은 지난 3년 동안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지요" (164~165쪽)

 

작가는 위 두 사람의 대화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한눈에 들어오도록 쓰지 않았다. 그러나 추론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 전달을 위해 두 사람의 대화가 진행되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라주미힌이 '실제적 정신'을 언급한 이유는 루진의 의견, 즉 '이제 새로운 지식에 눈을 떠야 하며, 그 지식 중 하나는 우선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라는 의견이 겉으로만 그럴 듯한 자신만만한 이론일 뿐이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이상적 이론으로는 '실제적 정신'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에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라주미힌은 '우선 자신을 생각하라'라는 주장이 결국은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 다르지 않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작가는 실제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새로운 이론들이 인류 전체의 이득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면서 주변의 고통스러운 이웃을 돌보지 않는 현실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의 등장과 그들의 대화, 심리 묘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럼 이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죄는 무엇일까? 등장인물의 말을 빌어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가난은 죄악이 아니다---이것은 진리입니다. (...) 그렇지만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면 말입니다. 맨주먹밖에 없게 되면...... 그건 죄악입니다. 사람이란 그저 가난하다는 정도에선 그래도 타고난 고결한 품성을 잃지 않는 법이지만, 알거지가 되고 보면 그런 고상한 감정 따위를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29쪽)

 

다른 죄들도 있다. 죄없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젊은이들이 손에 잡히는 대로 몽둥이와 채찍으로 숨이 넘어가려는 말을 때리기 시작했다." (77쪽)),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높은 이자를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들, 어린 소녀에게 흑심을 품고 뒤쫒아가는 남자("어떻게 해서든 이 소녀를 저 신사에게 넘겨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상 어떤 모욕을 줄 것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 저 악당은 아직도 노리고 있군요!"(67쪽))가 하는 행동들이 바로 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지 이렇게 명백하기만 했다면 작가가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의 고민은 누가 봐도 죄라고 여길 행동이 아니라 그 나머지 것들로 향한다. 예를 들어 아주 순결한 사람이 주변의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된다면, 그걸 죄라고 부를 수 있는가? 결과적 행위가 죄의 여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잣대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그 죄에 대한 벌을 어떻게 가하는 게 올바른 일인가?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이 물음에 (비록 자주 혼동을 느끼긴 하나) 자신만의 답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그 주관에 따라 일정한 행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 세상엔 법을 어기지 않았지만 (윤리적으로) 죄를 지었기에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도덕적 비난을 받을 만한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동기가 순결한 것이기에 벌을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몸을 팔게 되는 소냐)이 있다는 것이다.

 

위에 예시로 든 소냐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자랐기 때문에 취직자리가 한정되어 있고, 따라서 정직하게 일해서는 15 코페이카 밖에 벌지 못한다. 그 돈으로는 가족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고, 그렇기에 소냐의 계모는 소냐가 자신의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버는 것이 올바른 행동 아니냐며 윽박지르게 된다. 홧김에서인지 소냐는 결국 몸을 팔게 되는데, 계모는 그런 그녀에게 말없이 다가가 밤새도록 소냐의 발에 입을 맞춘다. 즉 몸을 팔게 된 행위의 동기는 순결했고 자기희생적이었기에 따라서 오히려 아름다운 행위로 묘사된다.

 

더 나아가 도스토옙스키는 소냐에게 몸을 팔라고 요구한 계모(카테리나 이바노브나)에게도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술주정뱅이 남편과 가난이 그녀가 그렇게 행동하도록 내몰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니 어쩌면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고리대금업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소냐와 그 계모에겐 동정심을 보인다. 그렇기에 작가는 굳이 계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는 것이다. "카테리나 이바노브나가 역시 말없이 소냐가 쓰러져 있는 침대로 가더니 밤새도록 그 발밑에 꿇어앉아 발에 입을 맞추며 일어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35쪽)

 

카테리나 이바노브나 역시 누군가 죄를 지었다면 마땅한 벌을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마르멜라도프)이 남편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비록 죽어가는 중이더라도 동정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죽어가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도 차갑게 명령한다. "잠자코 계세요! 말하지 않아도 돼요! 알고 있어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은!"(201쪽) 그리고 남편이 죽자 다음과 같이 외친다. "기어코 소원을 풀었어!"(202쪽)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이바노브나를 보며 어떤 질책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바노브나의 태도를 이해해주길 바란다: "몹시 가엾은 부인이니까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십시오. 그러잖아도 폐병을 앓고 있거든요. 될 수 있으면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 좋겠어요." (202쪽)

 

이런 행동은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동안 다른 사람들에게 보인 경멸과는 사뭇 다르다. 이것은 그가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을 자신 나름의 기준으로 어느 정도 구분짓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물론 이런 기준은 우리의 일반적인 믿음과는 상당히 다르다. 신부는 이바노브나의 행동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이 죽을 때는 모든 것을 용서해야만 합니다. 그런 말은 죄악입니다, 부인! 그런 감정 역시 죄악입니다." (200~201쪽) 이 신부의 생각이 보통 우리가 가진 윤리적 관념에 기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이바노브나는 강경하다. 그녀는 심한 기침을 하고 난 뒤 손수건에 가래침을 뱉어 신부에게 보여준다. 그 손수건은 피로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즉 그녀는 자신의 건강이 이런데도 술만 먹고 제대로된 책임을 지지 않았던 그 남편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피로 물든 손수건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내 몸 상태가 이런데도 남편을 용서하라는 말이 나오나요? 결국 "신부는 고개를 떨구며 입을 다물"(201쪽)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인물들 사이에서 소냐의 성품은 매우 두드러지는데 심지어 성스럽게 묘사되는 부분도 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것부터 자신의 주정뱅이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서까지. 그녀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는 변변한 옷조차 없는 자신의 딸에게 술을 마실 돈을 빌러 가는데, 딸 소냐는 그런 아버지에게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은 채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내놓는다. 마르멜라도프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30 코페이카나 주더군요. 그게 딸애가 가지고 있는 전부라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 이쯤 되고 보면 벌써 이 속세의 사람이 아닙니다. 저 세상의 사람이지...... 인생살이를 탄식하며 눈물을 흘릴 뿐 조금도 꾸짖지를 않습니다. 꾸짖지 않아요! 그게 나는 더 괴롭습니다. 욕하고 꾸짖지 않는 게 더욱 괴롭습니다." (40쪽)

 

라스콜리니코프가 보기에 세상의 순결한 존재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이처럼 희생을 한다. 계모와 그 아이들과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파는 소냐가 그렇고, 자신을 위해 희생적 결혼을 하려 한다고 믿는 그의 동생 두네치카가 그렇고, 자신을 위해 언제나 헌신적으로 살아온 어머니가 그렇다. "수수께끼의 열쇠는 바로 이것이다. 오빠를 위해, 어머니를 위해 두냐는 모든 것을 팔아버리는 것이아! 아아, 사람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의 도덕적 감정을 억누르고 자유와 양심까지도, 아니 그 이상의 것까지도 서슴지 않고 고물시장에 내놓는 법이다! 자신의 인생은 돌아보지도 않는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게만 된다면!" (61쪽)

 

그런데 그는 자신이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동생과 어머니가 그런 희생까지 해가며 자신을 위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한다. 자신 역시 희생을 하기로. 그리고 그 희생은 자신이 직접 악덕 고리대금업자를 처단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런 줄거리로 볼 때 라스콜리니코프가 가진 죄와 벌에 대한 초기 관념은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명백히 윤리적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당당히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와 반대로 잘못된 환경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비도덕적 행위를 하고 있으며 그 일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그 본심만은 순수한 사람들이 있다. 순수한 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지만 뻔뻔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오히려 당당하기만 하다. 따라서 나는 뻔뻔한 이들에게 벌을 내려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사실 라스콜리니코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독자의 관점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 스스로 죄에 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 이 소설을 통해 죄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상황들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의붓딸에게 황색 감찰을 은근히 주장했던 계모는 죄를 지었는가? 만일 계모의 남편이 착실히 돈을 벌어왔더라면 계모는 의붓딸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언급조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계모의 죄는 엄중한가? 계모는 의붓딸에게 몸을 팔아서라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말을 했지만, 실제로 의붓딸에게 몸을 팔라고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에도 계모가 죄를 졌다고 할 수 있는가? 의붓딸이 몸을 팔고 돌아왔을 때 계모는 무릎을 꿇고 의붓딸의 발에 밤새도록 입을 맞추었다. 이걸 볼 때 계모의 애초 의도가 사악하다고 볼 수 있는가? 계모는 주정뱅이 남편이 죽자 '드디어 소원을 풀었다!'고 외쳤다. 계모가 애써 모아둔 돈과 그녀의 옷까지 팔아서 술을 마셔버렸던 남편의 행동을 고려할 때, 계모의 그 말은 벌을 받을 만한 행위였는가, 아니면 이해로 포용할 수 있는 행위였는가?

 

 

* 하서 출판사는 작가의 이름을 '도스토예프스키'로 썼으나 나는 현재 외래어 표기법을 따랐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