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마, 그리고 싯다르타
이 책은 모호하면서도 명확한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이다. 모호하면서도 명확하다는 모순되는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이 소설이 일상의 경험을 넘어서는 깨달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 별은 나의 안식처이다"라는 문장을 생각할 때, 이성과 합리에 사고의 바탕을 둔 사람은 저 표현이 모호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물질 너머의 궁극적 실재나 초월적 지식, 혹은 지혜라는 것을 탐구하는 이들은 저 문장이 <저 별이 내 시야에 들어오면 바이오피드백을 통해 내 몸의 세로토닌 분비가 촉진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된다>라는 문장보다 더 명확한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어떤 독자는 이 소설을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괴상한 말이 담겨 있는 책으로, 또 어떤 독자는 우리를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훌륭한 책으로 여길 것이다.
즉 이 소설에서 헤르만 헤세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는 일은 각각의 독자가 지금껏 세상을 견지해온 인식의 눈에 달린 일이며, 또 그것을 이미 작가가 소설 안에서 충분히 설명했기에 따로 부연설명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내가 이 소설의 또 다른 재미라고 생각한 형식 기법을 토대로 약간의 글을 남기고자 한다.
잘 알려진 대로 부처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이 소설 주인공의 이름은 "싯다르타"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 주인공이 바로 부처 그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소설을 조금 더 읽다보면 "고타마"라고 하는 인물, 즉 부처가 동시대에 실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 이 싯다르타가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 즉 고타마 싯다르타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 헤르만 헤세는 왜 주인공 이름을 싯다르타로 지었을까? 이 의문이 이 소설을 계속 읽게 한 첫 원동력이었다. 이 주인공이 소설 속 부처인 고타마와 어떻게 엮이게 될지 궁금해진 것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니, 처음에는 단순해 보였던 그 분리, 즉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분리가 단순히 소설적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 속 싯다르타의 행동이 내가 실제 알고 있는 부처의 행적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게 된 것이다. 실제 부처는 고행을 통해서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음을 오랜 수행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뒤 수행 방법을 바꿔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다가 비로소 열반에 들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소설 속 싯다르타 역시 기존의 수행 방식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음을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고, 그 후 다른 방법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느 강가에 위치한 뱃사공의 집에 머물며 오랜 명상을 한 끝에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실제 부처인 고타마 싯다르타와와 소설 속 주인공 싯다르타의 이 유사한 체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다음의 두 가지 해석이 떠올랐다. 첫째, 싯다르타는 사실 소설 속의 고타마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즉,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부처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는 인물로, 단순히 사건의 전후를 뒤집어서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이때 부처 고타마와 싯다르타가 만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가능한 환상적 장치라고 해야할 것이다.
다음으로 부처 고타마와 주인공 싯다르타 모두 열반에 든 각각의 부처라는 해석을 할 수 있었다. 불교는 우리 모두가 노력에 의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데, 헤르만 헤세가 바로 이것을 소설 속에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때 싯다르타가 실제 부처와 비슷한 방식의 체험을 거친 후에야 열반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책 속에 쓰인 다음 두 문장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것은, 이러한 반복은, 이처럼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것은 한바탕의 희극, 기이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192쪽)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206쪽)
이 두 문장은 다음을 뜻한다. 아무리 부처라고 해도 언어를 통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지혜를 전달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부처의 말씀을 단순히 따르는 것만으로는 궁극의 행복,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광대한 생각을 담기엔 너무 좁은 그릇으로, 그 안에 부처의 위대한 생각이 모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상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가 따르고 있는 계율과 수행방법이 과연 옳은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고, 결국 그 구도자는 과거 성인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이렇듯 깨달음이란 실수의 "숙명적인 순환의 테두리" 속에서야 꽃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의 또 다른 누군가가 궁극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그 역시 싯다르타가 했던 비슷한 실수를 거친 뒤일 것이다. 어떤 후회나 고통을 겪어보지 않고서는 , 아무런 고민 없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만으로는 해탈에 도달할 수 없음을 헤르만 헤세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빈다의 선택
부처라는 위대한 성인의 일생을 소설로 쓴다는 것, 아니, 쓰겠다고 마음 먹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는 "고타마"와 "싯다르타"의 분리를 통해 그 일을 해냈다. 그것도 위대한 소설이라 이름 붙여도 될 만한 작품을 써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헤르만 헤세는 성인이 아니며 해탈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구도자였다. 그렇다, 소설 속 "고빈다"가 바로 그였다. 지혜를 추구하지만 '나중에 나타날' 부처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부처를 따라가버린 고빈다. 고빈다는 오래도록 수련을 했지만 여전히 힘이 들고 암담했다. 그는 옳아 보이는 말씀, 즉 현세의 부처를 알아보고 그를 따를 지혜는 있었으나 미래의 부처, 즉 싯다르타를 알아볼 지혜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구도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노력하는 구도자였기에 결국은 싯다르타라는 또 다른 부처를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헤르만 헤세도 마찬가지다. 그는 괴로운 구도자였고, 바로 그랬기에, 성스러움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무언가를, 바로 이 소설을 남길 수 있었다.
그는 이 소설을 남겼다. 이 소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는 이제 독자의 몫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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