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택은 <스타일에 대해>라는 글에서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했던 스타일에 대해 논한다. 손택의 이 글 역시 나로서는 일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상당히 획기적이었으며 옳아보이는 (캠프의 등장을 적절이 해석한) 주장이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이전 글에서 오해의 소지가 생겼는지 모르겠는데, 손택은 내용은 하찮고 스타일은 어떤 면에서나 '항상' 중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손택은 너무나 스타일에만 매달리는 바람에 그것에 사로잡혀 버린 예술을 '스타일화'되었다고 정의하여, 이것을 스타일과 구분했다. "'스타일화'는 예술가가 작품 속에서 내용과 표현 방식, 주제와 형식을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구분하려 드는 바로 그 순간에 나타난다."(42쪽)
손택은 스타일화가 그리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스타일화'는 '스타일'과는 달리 "그 예술작품이 지나치게 편협하고 반복적이 되거나, 작품 곳곳에서 삐걱거리다 작품 자체가 분열되거나, 둘 중 하나"(43쪽)가 되도록 야기하기 때문이다.
스타일화는 그런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스타일화는 분명 쓸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술의 효용성(특히, 도덕적 효용성)에 저당 잡힌 문화, 오락 예술과 엄숙한 예술을 갈라야겟다는 쓸데없는 의욕에 짓눌린 문화"(43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손택은 이런 문화 속에서는 스타일화도 유효하고 소중한 만족을 주게 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동시에, 손택은 스타일화된 예술이 진정 위대한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명백하다며 한 발 물러서기도 한다. 즉 그녀는 캠프가 진정 위대한 예술이 될 수는 없지만, 예술을 기이하게 해석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엉뚱함과 기발함으로 우리에게 만족을 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유효한 예술이 되었다고 말한다.
스타일이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예술은 세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인지, 그저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45쪽)이 아니기 때문이며,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의 형식, 즉 스타일에 대한 경험이지, 어떤 것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46쪽)기 때문이다.
2.
그녀의 글 <스타일에 대해>는 사실상 <해석에 반대한다>와 같은 논지(내용의 해석을 반대한다는)로 나아간다. 손택은 <스타일에 대해>에서도 <해석을 반대한다>에서 편 주장을 반복하고 있는데 가령 다음과 같다: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무언가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그저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은 아니다."(45쪽)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손택의 걱정은 과해 보인다. 지금은 예술이 진술문으로 취급되는 시대가 아니라, 예술이 상품으로 전락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술에 대한 지나친 해석, 특히 예술작품에서 개념적 지식을 창출하고자 하는 행위를 경계했다. 하지만 자본의 상품으로 전락한 예술작품에서는 해석의 이유는 물론---스타일화든 스타일이든 간에---탁월한 에너지와 표현성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우리 주변으로 그림과 음악과 소설 들이 빠르게 유입되고 있지만 스타일이든 내용이든 가치를 부여할 만한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예술은 빠르게 소모되어 일회성 재미를 주는데 그치고 있다.
이제 사실상 예술과 유행을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말았는데, 스타일이 예술의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 세력에도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 체 게바라의 얼굴이 그려진 옷이 상품화되어 비싼 가격에 팔리는 걸 보자. 어떤 이들은 그 옷 자체가 일종의 예술이라 주장하지만, 체 게바라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손택이 주장한 가치를 지지한다면 우리는 그런 옷 역시 예술로, 적어도 키치나 캠프 중 하나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반면, 체 게바라의 정신이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류로 취급되고 만다.
3.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술이 가하는 유혹을 너무나 아름답고 정당한 것으로만 가정했다는 것이다. 손택은 "예술은 유혹이지 강간이 아니다"(46쪽)라고 했다. 그러나 애국이나 가족, 불치병과 같은 대중적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작품은(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체험자의 감정을 '강간'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우리의 마음 속에 "격정의 화학이 존재"(<적을 만들다>, 249쪽)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뻔한 수법을 가미한 문장을 읽게 되면 "얼음 같은 심장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를 것이다(앞과 같은 쪽)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이런 눈물에도 분명 어떤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 노래가, 그 장면이 띤 예술성이 우리의 눈에 눈물이 맺히게 했다,라고 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고귀할지도 모르는 눈물을 뽑아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감동받기 때문이다. 예술 혹은 예술로 자신을 포장한 어떤 것들을 우리의 마음을 강제하기 위해 어떤 시도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것은 대개 성공한다. 주변의 모든 걸 때려부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헐리우드 영화에서조차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빠지지 않는 이유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녀는 예술이---상당한 부분에서---자기 지시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들도 예술을 그렇게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술이 현실 세계에 속하는 한, 그리고 우리 대다수가 그 현실 세계과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한, 예술 또한 그 자체로 존재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그녀의 주장은 일리있지만, 예술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부분에 적용하기엔 분명 무리가 따른다.
4.
그녀의 주장을 완벽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선 먼저 예술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창조물'을 그렇게 보자고 주장하기는 어려워보이며, 손택의 의도 또한 그것과는 다른 것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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