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손택의 가치는 그녀가 새로운 감수성이 도래했음을 알렸다는 것, 세계를 바라보는 개방적인 시각을 우리에게 선물했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감수성은 진지함, 엄숙함뿐만 아니라 오락이나 가벼움에도 관심을 던진다. 이런 감수성은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그 내용을 토대로 해석하여 재배치하려는 노력에서 벗어나면서부터 가능해진다.
물론 손택의 이런 주장을 시대를 초월한 모든 예술작품에 적용하기엔 분명 무리가 있다. 적어도 소설이라는 장르가 예술의 한 분야로 취급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는 그렇다. 만일 손택이 소설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면 난 손택에 여러 의견에 별다른 이의 없이 모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손택은 소설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의 주장에 의문부호(특히 형식주의에 대한 우려)를 붙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술은 예술 그 자체여야만 한다고 강제하려 하는 순간, 그 진술자체가 여러 모순과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예술작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주장, 즉 "예술작품은 그 자체가 마술처럼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는 건 분명히 예술의 한 기능을 옳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작품이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간---특히 문학에서---우리는 예술이 사라져 존재하지 않음을 목격하게 된다. 글자 그 자체는 우리 가슴을 설레게 할 수 없다. 글자가 문장을 이루어 어떤 내용을 담게 될 때에야 (거의 대부분의) 문학은 비로소 가치를 띤다. 따라서 손택의 주장은 예술의 일부 분야에는 적용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나 전체 예술을 아우르는 주장은 될 수가 없다.
2.
손택은 자신의 글 여러 곳에서 소설만큼은 자신의 예술론에 포함시키기 어려웠음을 슬몃 언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자주 인용했듯, 문학, 특히 소설을 예술에서 배제시키지는 않았다. 그녀의 주장에 공격당하기 쉬운 구석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런 태도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소설이란 장르는 그만큼 대하기 난해한 구석이 있다.
사실 비평가건 철학가건 소설가 그 자신이건 간에, 소설을 예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소설은 '내용'이라는 짐을 지니고 있고 따라서 그곳에서 무언가를 읽어내야 한다는 부담을 누구나 가지게 된다. 이런 생각은 소설을 교훈의 대상, 지식 습득의 대상,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 따위로 인식하게 만들고, 따라서 소설을 예술 혹은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니라 분절된 문장들의 집합체 정도로 축소시켜 버린다. 특히 고전 문학에서 이런 경향이 심해서, 고전 문학이란 줄거리만 알면 되는 것, 소설이 전하고자 했던 교훈이 뭔지만 알면 되는 것으로 여겨진지 오래이다. 즉 소설은 읽으면서 어떤 감수성을 느끼는 대상이 아니라, 어떤 것을 읽었다는 지적 성취의 대상일 뿐이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일부 비평가나 철학자 같은 사람에게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소설을 읽으며 감수성의 변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적 교양만을 쌓는다.
그런데 오히려 예술, 특히 소설에 닥친 이런 문제 때문에 난 손택을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어쩌면 그녀는 소설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논리를 더 완벽하게 무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소설을 떼어냄으로써 자신을 무장하기보다는, 소설을 안고 가면서 자신의 예술론을 보완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소설을 축약되어야 할 줄거리로, 사실이 아닌 단순한 허구로, 쓸데없이 길이가 길어 종이와 시간만 낭비되는 매체로 보는 일부 평론가, 비평가, 철학자 들의 생각에 반론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3.
난 손택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소설가들이 우리 시대의 창조적인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위치에 올라서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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