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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르 지도에 관한 나의 일화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3. 2. 11.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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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척 어렸을 때, 그린란드가 큰지 아니면 오스트레일리아가 더 큰지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난 오스트레일리아가 더 크다고 주장했지만 한 녀석이 가지고 온 세계지도를 보곤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지도엔 그린란드가 훨썬 더 크게 그려져 있었다. 난 다른 할 말이 없었다. 


내가 그때 메르카토르(Mercator) 투영법에 대해 좀 알았다면 뭔가 적절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때 그런 걸 전혀 몰랐다. 내가 메르카토르라는 말을 주의 깊게 보게 된 건 서점에 한쪽에 돌돌 말려있던 거대한 평면 세계지도를 대담하게 펴보았을 때였다. 그 지도의 제일 위쪽에는 Mercator라는 글자가 선명하고 굵은 글씨로 쓰여 있었다. 메르카토르에 대해 조금 알아본 나는, 그 지도의 이론적 특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위도가 높아질수록 지도의 왜곡이 커진다는 일반적 이론과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서구 열강에 의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정치적 내용이었다(먼저 말하지만, 메르카토르의 지도가 아프라카, 남미 등 제3세계를 의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일부 언론의 방송보도는 사실이 아니다. 메르카토르 지도는 순전히 항해를 편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난 여러가지 지도 투영법 중에서도 하필 왜 이 메르카토르 투영법이 16세기에 처음 만들어지고 또 널리 사용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 궁금증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1000가지 사건>에 나오는 "메르카토르의 지도제작 기법 개선"을 읽게 된 것이 계기였다. 거기엔 이런 설명이 있었다.


"장거리 항해에서는 항로를 잘 유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침반을 계속 봐야 했지만, 메르카토르 투영법은 항해자들이 직선으로 자신의 진로를 작성할 수 있게 해준다. 정확한 항해도는 모든 항해자에게 혜택을 주었고, 항해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137쪽)


그 글을 읽게 된 후, 그동안 그저 그 지도의 이론적 특성을 단순 암기하던 나의 사고는 "그 지도를 왜 그렇게 만들어야 했는지"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만든 지도가 없었을 때 바다의 선원들이 항해 중 어떤 어려움을 겪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그 어려움이 무엇이었을지 좀처럼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배에 탄 선장에게 나침반만 있다면 항로를 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즉 위도 37도, 경도 135도인 한 지역에서 위도 37도 경도 100도인 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 나침반이 가리키는 각도만 일정하게 유지한다면 그 배는 해당 위도를 벗어나는 일 없이 위도선을 따라 충분히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도는 사분의나 크로스스태프 같은 도구로 북극성의 고도를 측정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다. 남십자성이 알려지기 이전에 남반구를 탐험하던 선원들은 보이지 않는 북극성 대신, 그동안 천문학자들이 매일 관측하여 축적해놓은 태양과 특정 별의 적위를 이용하여 그 별의 위도를 계산해 낼 수 있었다. *


문제는 경도를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이론적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칼 세이건의 저서 <코스모스>에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적혀있다.


"당시 항해술의 핵심 문제는 바다에서 자신의 경도를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것이었다. 위도는 별자리를 통해서 정확히 알 수 있다. 남쪽으로 갈수록 위도가 낮은 곳의 별자리들을 볼 수 있으므로, 위도의 결정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경도의 결정은 시간의 흐름을 추적해야 하므로 위도의 측정보다 한층 더 어려운 작업이었다. 배에 실려 있는 시계는 배가 출발한 항구의 표준시를 가리킨다. 한편 태양이나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이용하면 배가 위치한 지방의 시간을 알 수 있다. 또한 몇몇 밝은 천체들의 천구상 좌표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천체들을 관측하면 지방시를 측정할 수 있다. 지방시와 표준시의 차이가 떠나온 항구와 현 위치의 경도 차이와 같다는 점을 이용하면 배가 있는 지점의 경도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292쪽)


위 인용문을 예를 들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즉, 어떤 해상에서의 시각(지방시)이 그리니치 표준시(경도 0도)보다 1시간 빠르다면 그것은 그리니치보다 경도 15도 만큼 동쪽이라는 뜻이고 1시간 늦다면 그리니치에서 경도 15도 서쪽이라는 뜻이 된다. 따라서 그리니치 표준시를 맞춘 시계만 가지고 있다면, 경도를 알고 싶은 지역에서 태양의 남중고도를 측정하여 그 지역의 시간을 알아낸 후 그리니치 표준시각과 비교만 하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만든 지도가 없어도 항해를 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난 배에 크로스스태프와 나침반, 그리고 표준시를 맞춘 시계를 실은 채 스페인 마드리드를 출발하여 위도와 경도를 알고 있는 카리브해의 한 섬을 경유한 뒤 그 섬의 북서쪽에 있다고만 전해지던 미지의 장소(뉴펀들랜드)로 향하는 나를 상상해보았다. 


나는 우선 나침반의 N극이 항상 북쪽을 가리키도록 조타 장치를 유지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경우 위도만 변하고 경도는 일정하게 유지된다. 그리하여 경유지인 섬과 동일한 위도에 도착했을 때 이젠 항로를 90도로 꺾어, 배와 나침반 바늘의 각도가 90도가 유지되도록 조정하며 나아갔다. 경도를 알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계속 90도를 유지하다보면 언젠가 그 섬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일을 대비해서 난 태양 및 특정 별의 적위와 고도를 조사하여 해당 장소의 경도를 확인하며 전진했다. 경유지 섬에 도착한 후로는 그 미지의 장소로 나아갔다. 배와 나침반의 바늘 각도가 45도가 되도록 유지하며 전진했다. 일주일이 지나자 한 대륙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난 육지에 내려 그 지역의 경도를 조사한 후 내 지도첩에 그 장소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했다.


결국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래서 난 당황했다. 메르카토르 투영법으로 만든 지도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분명 이 메르카토르 지도는 그 당시 손쉬운 항해를 위해 태어났으며 항해사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었다.


오래지나지 않아 난 내 오류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건 이론과 실제의 차이에서 나오는 격차였다. 상상 속에서 난 나침반을 이용하여 쉽게 북쪽을 찾아냈지만 실은 장거리 항해 중 진북이 자북과 일치하는 곳을 찾기는 어려웠으며, 그 차이 또한 장소에 따라 변화가 심하였고, 요동치는 배에서는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그 오작동은  배를 강철로 만들면서 더 심해졌던 것이다. 따라서 나침반에 의존한 항해란 실제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크로스스태프로 별과 태양의 고도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정확히 맞으면서도 습하고 짠 바다의 해풍을 견디는 시계를 만든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계속 좌표 측정을 해가며 배의 방향을 조절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르카토르 지도가 나타난 것이었다. 메르카토르 지도만 있으면 (항해 시마다 뱃머리를 일정한 각도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이) 그저 배를 직진으로 전진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메르카토르 지도상에 그려진 위도선과 경도선은 실제 지구와 달랐지만, 그 선 자체가 항정선(Rhumb line)과 대권(Great Circle)을 나타내고 있었으므로, 비록 한 지점에서 한 지점으로 가는 그 거리가 (항정선의 경우엔) 최단거리가 아닐지라도 그저 직진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되었으니 항해에 큰 편리함을 가져다주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머릿속의 이론이 현실과는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내게 알려준 일화였다. 생각해보면 내겐 하나의 큰 사건이기도 한 셈이다. 메르카토르 투영법은 꿈과 현실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삶에서 그 둘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 관측대상의 남중고도 = 90 - 관측지방의 위도 + 관측대상의 적위



- 참고자료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1000가지 사건(내셔널지오그래픽 2010) 137쪽

코스모스.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사이언스북스 2012), 292쪽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Rhumb_line

온라인 브리태니커(http://timeline.britannica.co.kr/bol/to ··· 3D104788)

항해자의 친구들(http://blog.naver.com/mdkdk?redirect=lo ··· 06015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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