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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좋은 삶과 미덕에 대한 고민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12. 15. 21:54

본문

1.

잠시 들렀던 서점에서 어머니는 책을 한 권 사줄 테니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가져 오라고 하셨다. 나는 때마침 매대에 한 권 놓여있던 유발 하리리의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 특별판을 집어들었다. 어머니는 책 표지를 보시더니 뭐하러 이렇게 어려운 책을 읽느냐고 타박하셨다. 난 그 타박의 의미를 이해했다. 이미 남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세상살이가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직장 다니면서 돈 벌고 그 돈으로 원하는 걸 구매하고, 먹고 노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고 애가 커가는 모습에서 행복을 누리며 천천히 노후를 준비하면 그만인데, 뭐하러 인류의 기원이니 사이보그니, 역사니 하는 책을 읽어서 어려운 일에 스스로 뛰어드느냐 하는 물음이었다. 어머니가 보시기에 그런 책을 읽어 얻는 지식은 아무짝에 쓸모 없는 것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몇 만 년전에 어디에서 번성했다거나 인공지능이 미래에 인본주의를 어떻게 위협할 것이란 사실이 도대체 지금의 삶에 어떤 도움을 주는가? 그 지식으로 먹고 사는 교수나 고고학자라면 모르겠으나, 그 외의 사람들은 알 필요도 없는 내용이었다. 출판사에서 그 책의 날개에 마크 저커버그나 빌 게이츠가 추천한 책이라는 홍보 문구를 달아둔 것은 바로 그런 문제제기에 대항하기 위해서일 것이나, 성공한 자들이 추천한 것이니 도움이 될 것이란 식의 제안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히려 내게는 그리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그러한 질문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세상과 적절히 타협하며 살면 편하게 굴러갈 수 있는데 굳이 왜 정의에 관심을 갖는가? 학교에서 한 집단이 소수에게 집단 따돌림을 가하고 있을 때 못 본 체하고 내 할 일이나 열심히 하면 그만인데 왜 굳이 그 문제에 끼어드려 하는가? 어느 지역에서 재개발로 원주민들이 쫓겨나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뭐하러 그 일에 관심을 갖는가? 성공한 사람들이 추천한 책이라는 홍보 문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뒤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의 권위를 따르면 그만인데 무엇 때문에 굳이 그 홍보전략에서 통속성을 발견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정의'를 알아서 좋을 게 무엇인가? 괜히 정의를 위한답시고 거리로 나가 데모를 하거나 1인 시위를 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몸 고생에 마음도 지치며 사회에서는 배척당해 결국 낙오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책을 읽지 않았다면 그저 평범한 가정의 한 일원으로 평범한 행복을 누렸을 텐데, 괜히 저런 불경한 책을 읽고 그에 자극을 받아 사회 운동에 뛰어들지나 않을지 어머니의 마음엔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난 이러한 문제제기와 우려를 통해 저자 마이클 샌델이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최종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명제의 일부를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마이클 샌델은 여러 사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이 어떻게 부딪히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 것이 좋은지를 논한다. 그런데 이런 논의 과정을 통해 저자가 최종적으로 권고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정의'의 뜻 그 자체가 아니다. 그는 '정의'보다 오히려 '도덕'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정의 앞에 도덕을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우선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좋은 삶에 대한 고민 없이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같은 반의 누군가가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학업 성취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걸 잘 안다. 따라서 우리 부모와 학교 교사는 우리가 정신적, 육체적 폭력을 수반한 집단따돌림으로 교실 한 구석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한 학생에 신경 쓰기보다는 그저 의자에 앉은 채 교과서에 충실할 것을 바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가 도덕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이들에겐 종교적 믿음ㅡ예수가 제시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ㅡ에 관한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도덕에 관심이 없고 지향하고자 하는 종교적 믿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어느 학생이 받고 있는 피해에 무관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오로지 교과서와 학습지에만 몰두하여 사회가 부여하는 등급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어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마이클 샌델은 그러한 삶이, 그러한 사회가 왜 문제가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도덕과 좋은 삶에 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2.

<정의란 무엇인가>를 중간 정도에서 덮어버린다면 마이클 샌델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그는 책의 후반부가 되어서야 조금씩 자신의 의도를 내비친다. 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목적 있는 삶'을 거의 마지막에서야 자세히 언급하기 시작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이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와 적잖게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정의를 세 가지 방식으로 탐구하고 있다. 하나는 행복을 극대화하는 공리주의, 또 하나는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와 자유주의적 평등주의), 남은 하나는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공동체주의이다. 저자는 명백하게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첫 번째의 공리주의는 단점이 워낙 많아서 정의의 관점에서 퇴출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다. 문제는 두 번째인 자유주의와 세 번째인 공동체주의 사이에서의 고민이다. 두 번째 방식인 자유주의 이론들은 권리와 정의를 중요시하고 있는데, 이 이론들은 어떤 권리와 정의가 중요한가를 결정하기 전에 "사람들의 기호를 있는 그대로 인정"(361쪽)하면서 "우리가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취향과 욕구에 의문을 품으라고 요구하지 않는"(361쪽)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가장, 그리고 여러 예시를 통해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이다. 그가 여러 사례를 통해 제시했듯이, 좋은 삶의 의미를 고민해 보지 않고서는 정의로운 사회를 다루기란 불가능하다. "정의는 올바른 분배만의 문제는 아니다. 올바른 가치 측정의 문제이기도 하다."(362쪽)


모든 것에서 구속을 없애자는 자유주의자의 주장은 매력적인 데가 있다. 하지만 너도 옳고 나도 옳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중립 지향적인 가치관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갈망을 해소시켜 주지 못했다. 그는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의 인기를 단순한 달변이 아니라 그러한 갈망의 해소에서 찾았다. 마이클 샌델에 따르면 버락 오바마가 구사했던 정치언어에는 "자유주의적 중립을 뛰어넘는 도덕적, 영적 차원이 존재했다."(349쪽) 그는 버락 오바마의 연설문을 다음처럼 인용했다. 


"날마다 미국인 수천 명이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차를 몰고 출근하고, 서둘러 업무 회의에 들어가고, 소핑몰에서 물건을 사고, 다이어트를 하는 등의 일상생활을 하다가, 문득 뭔가 빠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이제 일, 재산, 휴식, 바쁜 생활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목적의식이, 서사적 궤적이 필요해졌습니다."(349쪽)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 중 하나는 '목적의식'이다. 자유를 갈망하며 중립만을 내세우다 보면 우리는 삶의 목적의식을 잃어버린다. 버락 오바마, 그리고 저자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살 수 없음에 주목했다. 무엇이 좋은 삶인가? 어떤 이들은 '이렇게 살아도 좋고, 저렇게 살아도 좋다, 단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도덕과 그에 기반한 좋은 삶을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다. 그에 반해 저자는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결정할 수 없고,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바람직하지"(349쪽) 못하다고 말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쟁점이 있는 어떤 문제를 다룰 때 도덕적, 종교적 문제를 다루지 않은 채 결정을 내리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중립적인 것처럼 보여도ㅡ임신중절, 줄기세포 연구, 동성혼의 문제처럼ㅡ그 중립적인 의견조차 실은 도덕적이자 종교적인 견해를 품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마이클 샌델이 보기에 자유주의자들은 중립인 척하며 여러 문제를 외면하고 있었다.


한 학생이 같은 반의 학우가 명백히 집단따돌림을 당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음에도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자기 공부만 했을 때, 자유주의자들은 그 학생, 그리고 동일하게 그 행위를 무시한 다른 모든 학생들에게 어떠한 도덕적 책임도 묻지 않을 것이다. 외면한 학생들은 자유롭게 선택했고, 그 선택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우리는 특별한 가치관을 띠고 있는 도덕적 의무를 강요받을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점이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하다. 그 누구도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른 이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여러 문제에서 이른바 '중립'을 선언한 뒤 손을 떼 버린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내 공부만 하겠다는 학생들 역시 그러한 관점을 따르고 있다. 만일 이러한 학생들에게서 아무런 문제점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독자는 마이클 샌델의 주장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샌델이 여러 사례를 통해 조금씩 전개하고 있는 논의로 자신의 시야와 지평을 넓힌 독자라면 이제 정의를 넘어 미덕과 좋은 삶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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