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한동일 <라틴어 수업>, 젠체하고 싶은 그 유치함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12. 4. 13:24

본문

1.

<라틴어 수업>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인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며 곁들였던 인생 수업을 주제로 하고 있다. 라틴어로 '단점'을 뜻하는 '데펙투스'라는 단어를 언급하다가 "자신의 단점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남 탓만 하며 살고 있지는 않나요?"라고 묻고, 라틴어로 최우등 성적 평가를 뜻하는 "숨마 쿰 라우데"를 언급하다가 "우리는 자신을 남과 비교하며 초라하게 여기지 말고 최고라 생각해야 합니다"라고 조언한다. 언뜻 보면 이런 식의 가르침이 어른들에게 울림을 준다는 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저런 조언들은 이미 학창 시절에 충분히 배운 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 오히려 나이를 먹어갈수록 스승이 필요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더 이상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는 위치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오래된, 오래 전에 배웠던 가르침을 잊어버리게 된다. 인간은 청년기를 지나 장년과 중년에 다가갈수록 멀어져 가는 꿈과 이제 되찾을 수 없는 청춘과 건강, 가까운 관계에 있던 사람들의 죽음으로 어릴 적의 감정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크나큰 상실감을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다 큰 어른이 "행복의 파랑새는 내 마음 속에 있다" 같은 동화책 속에 나오는 문구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자기계발 서적이, 공감과 위로의 서적이 끊임없이 인기를 끄는 건ㅡ비록 다소 뻔하고 식상하며 사탕발림처럼 보일지라도ㅡ우리의 마음은 항상 파도치고 과거의 배움을 잊기 때문이다. 우리는 몸이 아플 때는 병이 낫기만 하면 매일 운동하고 건강한 식생활을 유지할 것처럼 굴다가도 다시 건강해지면 곧 그 다짐을 잊어버린다. 내가, 심지어 평소 그런 책들을 경시하던 내가 연달아서 세 권의 자기계발서, 혹은 그와 연관된 책을 읽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마음 속 어딘가에 아직 확신하지 못한 의혹으로 남아 있는 매듭을, 혹은 내 손으로 다시 묶어버린 매듭을 이런 책들의 도움으로 풀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2.

매듭은 쉽게 풀릴 듯 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이다. 난 자기계발 서적에서 공감과 위로를 얻는 동시에 그 한계 또한 느끼는데, 그건 이런 책들의 저자들이 거의 한결 같이 지독한 과몰입과 자기 확신의 천재였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쓰는 사람들, 다시 말해 "카르페 디엠, 오늘을 즐겨라"라고 말하는 저자들은 거의 대부분 오늘을 즐기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한동일 교수의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지독한 노력파였으며 그간 얼마나 많은 일을 해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과거에' 오늘을 즐기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바로 지금' 오늘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런 책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평소에 실천하며 사는 사람들(항상 현재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책에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위로의 말에 구원의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은 대개 어느 한 가지에 지독하게 몰두하다가 실패, 혹은 상대적인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 사람들이다. 그런 실패와 상실은 실제로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워낙 목표의식이 강하고 꿈꾸는 목표가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상실은 희망의 대가이다. 저자는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라틴어를 인용하지만, 반대로 '삶이 있는 한 상실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건 자기계발 서적이 마음의 파도를 결코 멈춰줄 수 없다는 걸 암시한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위로와 공감의 책을 읽고 나서ㅡ그 책의 메시지대로 멈추거나 느려지는 게 아니라ㅡ다시 힘과 희망을 얻고는 경쟁 사회에 다시 한 번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는 그런 식으로 쓰인다. 그러다 다시 한 번 좌절의 쓴맛을 보게 될 때, 이번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의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는 또 다른 희망의 메시지이다. 



3.

위로와 공감은 객관적인 윤리나 도덕, 정의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마음을 일시적으로나마 풀어주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라틴어 수업>의 저자는 책 곳곳에 자신의 가치를 추켜세우는 문구를 집어넣었고, 자신이 쓴 책을 스스로 여러 번 인용하였으며, 자신의 라틴어 수업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를 드러내는 수강생들의 편지를 과히 수록하는 등, 과시로 여길 법한 행위를 했지만 그렇기에 이런 행동들은 용인된다. 자기 위로라는 것은 본래 그런 형식, 일종의 나르시시즘을 띠기 때문이다. "젠체하고 싶은 그 유치함"이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은 자기중심적으로 행해질 때에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위로와 공감의 책들은 남들이 '별 것도 아닌 걸로 자랑질'한다며 비난할 때, 그에 맞서 '나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자랑할 만한 일을 했다'며 맞서라고 조언한다. 이는 반쪽짜리 조언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각박함과 이기성이 놀랄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시대엔 자기 중심적 세상보기가 당연히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비난이 심해질수록 그에 대한 반발 역시 강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야유와 조소의 대상이 되곤 하는 '인스타그램의 허세'를 단순히 허세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위로와 공감의 서적들이 조언하고 있는 자기 위로를 그런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자존감 세우기다. 만일 이 지상에 반쪽짜리 진실과 조언이 통용되는 사회가 내려앉았다면ㅡ그것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기 전에ㅡ비난자 스스로 자기 자신이 그런 상황을 초래하도록 행동하지는 않았는지, 혹은 타인의 고통에 무심한 채 스스로 진실이라 믿는 것에만 일방적으로 열중하지 않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공감과 위로의 책들은 윤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를 꾸짖는 듯한 도덕에서 위로를 찾지 않는다. 재수없는 허세꾼들과 비난을 무기 삼은 청교도들 사이에서, 지독한 노력으로 승리를 쟁취한 자들과 성공한 자들이 가르치는 느리게 걷기의 방법론이 위로에 목마른 이들에게 차선의 자비를 베풀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나는 알듯말듯한 승리와 패배, 달콤한 위로와 자기기만의 주위를 서성인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