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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세터 외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맏이들에게 보내는 위로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11. 14.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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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째 딸의 심리를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방법론적으로 문제의 요소가 있다. 북유럽 출신의 저자들은 첫째 딸들의 특성을 근거이론을 통해 유추해 내고 있는데, 방법론 자체에 취약점이 많아서 그 이론을 통해 도출해 낸 특성들을 '첫째 딸만의 것'으로 단정짓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현대는 핵가족화 시대로 그에 따라 분류의 결과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저자들이 말한 근거 이론을 토대로 도출해낼 수 있는 결과물은ㅡ자녀가 두 명 이하라고 가정할 경우ㅡ여섯 가지[각주:1]에 불과하다. 게다가 '첫째 딸들의 특성'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으니 여섯 가지의 특성 중 맏이의 성별이 같은 경우를 합해버리면(예를 들어 '첫째 딸'처럼) 도출할 수 있는 결과물의 가지수는 네 개로 줄어버린다. 결국 자녀가 두 명 이내로 이루어진 현대의 대다수 가족 구성원들은 네 가지 성격 유형 중 하나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독자들은 이 책,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의 논지에 상당히 공감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성격은 단일하지 않고 여러 가지 속성을 지니는 바, 네 가지 결과물 중 한 가지, 즉 이 책의 저자들이 첫째 딸들의 공통점이라고 소개했던 특성 중 하나를ㅡ우리가 첫째 아들이든, 둘째 딸이든 간에ㅡ우리 모두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첫째 딸이 리더십이 강한 경향이 있는데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자기 동생, 즉 둘째를 이끌면서 훈련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주장은 가정 환경의 수많은 변수들ㅡ누구의 손에서 길러졌는지, 부모가 자녀 둘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는지, 비슷한 또래의 친인척들이 많았는지, 부모가 통제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지, 어려서부터 늦게까지 학원을 다녔는지, 선천적으로 건강했는지, 병치레가 잦았는지 등ㅡ을 배제하고 있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스스로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20대 여성에게 다가가 '당신은 첫째 딸입니까?'라고 물어보자. 그녀가 첫째 딸인 확률은ㅡ근래의 일반적인 가족 구성(4인 가족)을 고려할 시ㅡ무려 50%에 이른다.[각주:2] 그 높은 확률을 무시한 채 '역시 첫째 딸은 책임감이 강한 경향이 있다'고 도출한다면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2.

그럼에도 이 책의 논지는 독자들에게 위안을 주는 바가 있다. 인간은 갈대처럼 약한 존재로,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시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즉 내가 자주 투덜거린다면, 필요 이상으로 책임감이 강해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그건 내가 첫째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첫째로 태어났기에 미숙한 부모 밑에서 미숙하게 자라났으며 둘째에 대한 과도한 의무를 부여받아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성공한 맏이들을 찾아가서 당신이 성공한 이유는 첫째로 태어난 덕분이라고 한다면ㅡ설령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ㅡ기분이 언짢을 것이다. 자신이 해왔던 수많은 노력과 극복을 단순히 첫째로 태어난 운 때문이라고 한다면 누가 좋아할 것인가? 그 때문에 저자들은 첫째 딸들의 장점을 말할 때마다 곧이어 그들의 고충을 언급한다. 첫째들이 성실하고 남을 보살피길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괴로움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첫째 딸로 태어난 이들을 위로하려는 데 있다. 그 근거가 사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위로라는 건 사실을 엄밀히 따져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론이나 추측들은 저자들이 첫째 딸에게 보내는 위로가 단순한 아첨이나 무조건적인 공감이 아니라는 그럴 듯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 근거는 출생 순서라는, 자녀가 결코 선택할 수 없었던 운명적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네가 선택할 수 없었으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강력한 무기로써 말이다. 이 방식을 이용하면 또 다른 위로가 가능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과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길 잘했어!', '한국에서 태어나길 정말 잘했어!'로 마무리 될 것이다.



3.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방식은 정말 강력하다. 진실로 독자들에게 위안을 준다. 난 심지어 여자가 아닌데도 큰 위로를 받았다. 위로를 받아들이는 마음 한 구석엔 다소 편협한 부분이 있었지만ㅡ내 성격이 이렇게 못난 것은 출생 순서 때문이라는 핑계ㅡ어쨌거나 나는,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위안을 얻는다. 어쩌면 사실일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의 유아기는 부모의 절대적인 영향 하에 있었다. 마치 선택할 수 없었던 출생 순서의 연장선처럼. 우리의 주체성이 없었던 시절에 우리에게 주입되었던 모든 경험은 우리가 실은 무죄라는 변호의 증거가 되어 주기도 한다. 다만 그 변호를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다. 언제까지 스스로를 유아기의 영향 아래에 놓아둘 것인가? 우리는 결국 그 시절을, 그 과거를 극복해 내야 한다. 우리가 이겨내려 시도할 때, 고통의 원천이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은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시도에 힘과 위안을 실어준다.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건네주는 말 한 마디의 위력에는 실로 놀라운 데가 있다. 냉철한 분석가들은 그 위로에 가짜라는 혹은 일시적이라는 위험 신호를 보내지만 우리는 온갖 비판에도 쓰러지지 않을 만큼 강인하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는,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에 구원의 빛을 얻기도 한다. 그런 빛은 힘들고 어렵고 고된 시절에, 개인에게 쉽게 비난이 가해지는 시절에, 익명성에 숨은 손가락질이 춤을 추는 시절에, 바로 요즘 같은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1.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딸 2) 딸-아들 3) 딸-딸 4) 아들 5) 아들-딸 6) 아들-아들 [본문으로]
  2. 여성에게 첫째 딸이냐고 물은 것이므로 아들-아들이나 외동 아들 같은 경우는 배제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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