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을 읽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다. 희곡은 나의 관심사에서 크게 벗어나있었다. 이걸 읽게 된 것도 우연으로, 프랑스 문학 관련 책들이 꽂혀 있는 곳을 걷다가 '장 라신'이라는 이름이 눈길을 끌어 보게 되었다. 이 생소한 이름의 희곡에서 곧바로 느낄 수 있었던 건, 황제의 절대권력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이해야하는 이들의 애처로운 행동들과, 좋게 끝났을 수 있었을지도 모를 그들의 운명을 어긋나버리게 만드는 질투였다. 사실 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사전에 보았던 '해설'에 의존한 바가 크다. 그리고 그것이 이 희곡을 특별하게 만들어 줄만한 내용도 아니었다. 질투와 권력 그 자체라면 왕가 관련 이야기에서 많이 채용되던 흔한 소재였다. 왕족이 주인공이던 그때의 희곡과 오늘날 재벌들이 등장하는 TV 드라마와 어떤 차이가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번역과정에서 사라져버린 운율을 고려한다면? 서사가 오늘날의 이른바 '막장 드라마'라고 부르는 그 이야기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난 인물의 대사에서 느껴지는 각 인물들의 성격이나 표현들의 참신함 등을 보고자 했다.그 특유의 표현법('내가 널 꺼내 준 그 허무로 되돌아가라'(v. 524), 또는 '믿음과 명예가 이 부당한 행복을 탓하지 않으면 좋으련만'(v. 944) 또는 '내 분노는 복수할 생각뿐'(v. 1277))이 내 눈길을 끌었다. 그런 문체는 매력적인 데가 있었고, 책을 읽을 당시 다른 것보다 그걸 알아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자 수확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일까? 그들의 비극이 나에게는 왜 이리 감흥을 일으키지 못할까? 그리하여 난 바자제에 대한 논문을 찾아 읽어보기에 이르렀다.
바자제를 읽다가 느꼈던 의문 중 몇 가지를 이 논문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오스맹이 '우리가 쳐다만 보는 것도 금지된 이곳'(v. 25)이라고 언급하는 장소가 하렘이라는 것(바자제에는 그 장소가 단지 '황제의 궁궐 내' 그리고 '후궁'이라고 설명되어 있는데, 이 논문의 저자는 그것이 하렘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단서가 적혀있지는 않으나 정황상 하렘이라고 보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바자제에 등장하는 세 명의 사자(오스맹, 어떤 은밀한 명령을 부여받은 노예, 오르캉)들의 역할 구분, 그리고 전반적인 흐름 이해가 그렇다.
하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는데, 먼저 록산이 바자제와 결혼하려는 이유가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황제의 애첩에서 벗어나 황후가 되려는 방법의 일환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미 록산은, 비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황후의 위치에 올라있었으며 황제가 전쟁을 떠나며 전권을 위임할만큼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단순히 더 높은 권력욕으로 황제를 배신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록산의 독백들(맹목적 사랑의 결과가 이건가? (v. 1070), 둘을 찌르고 나도 자결하리(v. 1248), 많은 선의와 배려, 열의에도, 넌 날 사랑한다 말한 적이 없어! (v.1306))을 보았을 때 그건 권력이라기보다는 정념에 넘치는 여인의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록산이 말하는 몇 가지 구절을 가지고 그걸 록산이 추구하는 최고 지향점, 즉 '바자제를 가교로 삼아 정통적 권력을 장악하고 후궁이라는 공간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것은 록산에게 있어 절체절명의 명제*'라고 말하는 것은 오류에 가깝다. 오르캉에게 과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도 억지스럽게 느껴졌는데, '정보의 전달자에 불과한 사자 오르캉이 후궁에서 절대적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바자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말 그대로 그는 정보의 전달자였고, 그가 단지 황제의 명을 가지고 왔다고해서 절대적 존재로 부각될 수는 없다. 만일 그가 그렇게 절대적 존재였다면, 그가 바자제를 죽였다는 이유로 곧바로 오스맹에게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치적 음모와 연인간의 질투가 부른 주인공들의 연속적인 죽음이라는 한편의 비극을 머릿속에서 전개하고 이해하는 데 이 논문이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의 문학적 재미를 알아가는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바자제란 작품이 한편의 멋진 희곡이었느냐고 묻는다면---상황전개가 억지스럽고(편지가 발견되는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인물들의 선택이 운명적이라기보단 어리석고 비극적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사랑에 실패했다고 연인을 죽이거나 자살을 하는), 그리고 문예체를 선택한 번역이 읽기에 수월하지 않았다는 점에---좋은 한편의 희곡을 읽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러나 중세에 작성된, 중동을 배경으로 하는 흥미로운 비극 한편을 보았다는 의의를 생각하면 그 또한 나쁘지 않았다.
* 저항과 억압 그리고 상상의 공간: 라신의 바자제 연구/ 정재훈 (한국프랑스어문교육학회 2008.11.30) 508쪽
** 같은 책 5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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