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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 <파리의 아파트>, 대중소설의 정점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8. 7. 2.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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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대중소설의 현 위치가 어떤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현대 대중소설의 눈금자를 파악하기 위한 소설로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를 선택한 건 연일 언론에서 홍보하고 있는 기욤 뮈소 '현상' 때문이다. 도대체 이 작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나도 한땐 시드니 셀던의 책을 탐독했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좋아했고 코난 도일도 좋아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다. 학창 시절에 읽던 책들. 그때는 단순히 재미로 책을 읽었으니까. 기욤 뮈소의 소설은 그런 소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미를 추구하는 소설. 기욤 뮈소는 자신의 소설에 대가들의 명문을 틈틈이 집어넣는 방식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획득하려고 시도했고 일부는 성공했지만(독자는 괴테의 작품을 직접 읽기보다는 기욤 뮈소의 소설책에 들어 있는 괴테의 짤막한 인용문 하나에 밑줄 치는 걸 더 좋아한다. 독자는 그런 식으로 괴테를 '획득'한다) 그 방식 역시 일종의 상업적 도구라는 점에서 문학적 평가를 받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내 아이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나 피천득의 <인연>이 아니라 기욤 뮈소의 <파리의 아파트>를 읽고 있다면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책을 읽는 건 50권 분량의 만화, 혹은 16부작 TV 드라마를 보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 1위라는 사실이 그 책의 문학적 가치를 나타내 주지는 않으며, 베스트셀러를 읽는 행위가 그 자체로 독자의 수준을 고양시켜 주지도 않는다. 베스트셀러 1위인 소설책을 읽는 것은 시청률이 1위인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도구가 TV가 아니라 책이라고 해서 특별해질 건 없다.


하지만 아무리 명작이라고 해도 내 아이가 조르주 바타유의 <불가능>이나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다면 그 또한 썩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읽기엔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염려의 마음으로 보면 모든 것이 불안하다. 


그러니 기욤 뮈소의 소설에 장점이 없을 수는 없다. 그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긍정성은 그의 책을 읽는 행위가 사회성이 너무 떨어져 고립되지도, 혹은 지적 능력이 너무 뛰어나 괴팍하지도 않을 정도의 평균적인 소양을 보장해준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대중소설이 주는 편안함과 안도감이다. 현명한 독자는 그 무난한 만족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 안일함에 언제나 주의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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