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난 어디를 가든 되도록 사진을 남기려 하는 편이다. 지금껏 사진을 좀 더 찍어둘 걸, 하고 후회한 적은 있어도 많이 찍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을 뿐더러, 별 생각 없이 찍어두었던 사진이 훗날 내게 도움을 줄 때가 종종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무언가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을 때 당시 찍어두었던 사진이 도움을 주곤 했다. 사진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때로는 무심결에 찍어둔 나무 사진 하나가, 때로는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채 구석에 위치해 있던 작은 이정표가 내게 기억의 단서를 보냈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 옛 사진을 보며 드는 생각들.
그렇게 사진은 잘못된 기억에 수정을 가한다. 사진이 잘못될 리는 없으니 기억이 잘못된 것일 터. 이런 경험을 나만의 독특한 체험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사진에서 자신의 오랜 기억을 재발견하고 있으니. 하지만 사진이 꼭 한 가지 해답만을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한 사진을 바탕으로 기억해낸 어떤 사건이, 뒤늦게 발견한 또 다른 사진으로 인해 수정되기도 하였으므로. 사진도 당시의 모든 것을 담아낼 순 없었다. 사진기의 정해진 화각과 일시적 노출은 우리에게 한계와 함께 해석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2.
역사학자 전우용은 그의 책 <서울은 깊다>에서 서양인들의 카메라에 찍힌 최초의 조선인 사진이 신미양요 때 미군과 싸웠던 조선 병사들의 포로와 시체라고 썼다. 최초의 조선인 사진이 전쟁 시체와 포로라는 점은 중요하다. '최초'의 사진이 비극적이라는 점에서 전우용은 우리 역사의 불행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의 감정을 다소 희석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조선인이 찍힌 최초의 사진이 신미양요 때라 한다면 1871년이 될 텐데, 그보다 앞선 1866년 병인양요 때의 조선인 사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전쟁 관련 사진이니 외세의 침략을 목전에 둔 조선의 불우한 명운이라는 감정을 주는 데 있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이른 시기의 조선인 사진이 또 발견되었다. 1863년 음력 1월, 중국 방문사절단인 이의익 등 조선연행사 일행이 베이징에서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나타난 것이다. 이의익은 이미 연행사 보고서인 <연행초록>에서 '사진'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지만 이들 일행이 베이징에서 찍었다고 한 사진은 행방이 묘연한 터였다. 그랬던 것이 2008년에야 공개된 것인데, <서울은 깊다>의 초판 발행일 역시 2008년이었으니 그가 새로운 사진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접했다 하더라도 책 내용을 수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책의 내용은 그대로이지만 역사는 역사대로 흘러 새로운 사진이 나타났으니 이제 기억은 또 다시 수정되어야만 한다. 1
"자, 절대로 움직이지 마시고, 여길 보세요!"
서대문 모화관을 출발하여 이의익과 함께 베이징에 도착한 이항억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만난 러시아 사진사가 외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연행초록>에 남겨두었다. 그런데 그가 결코 알 길이 없었던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백 년도 넘는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날 그의 사진이 우리 역사에 가할 기억의 수정이었다.
3.
사진기는 근대의 물품이지만 옛 사진들은 아직도 '발굴'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발굴은 우리의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2014년에는 명성황후의 장례 행렬 사진이, 2016년 2월에는 광화문 현판이 잘 드러난 사진이 발견되더니, 그 해 8월에는 대안문을 나서는 고종 황제의 어가 행렬 사진이 발견되었다. 모두 희귀한 사진들이지만 당장 영향을 미친 것은 광화문 현판 사진이었다. 이 사진 덕에 광화문의 현판이 지금처럼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자가 아니라 검은색 바탕에 흰색 혹은 금색 글자일 거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에서는 현재 여러 색깔 후보군으로 현판을 만들어 사진과 가장 비슷한 색을 재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광화문은 이미 여러번 복원되었지만 지금도 복원 중이며 다음에 또 어떤 사진이 발견되어 어떻게 복원될지 알 수 없다. 광화문 성벽 앞의 해태상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지도 모르고 삼문 앞에 놓여 있던 월대가 복원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삼문 옆에 있었던 옛 경비초소도 언젠간 복원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홍예문 아래 홍예개판이 아닌, 초소에서 비바람을 피하고 있는 수문장 교대의식 수행자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광화문은 하나의 이름이지만 발굴되는 새로운 사진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다. 기억은 쉽사리 공유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번 주입된 기억은 좀처럼 변하기 어려우니,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미양요의 시체와 포로를 조선인을 찍은 최초의 사진으로 기억하고 있다. 인도 없이 차만 통행 가능하던 시절의 광화문을 현재의 광화문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음은 당연하다. 이렇듯 옛 기억은 세대를 분절시키고, 사진은 연결의 실마리를 남겨 놓는다.
4.
"아, 그땐 머리가 이렇게 길었네." "와, 이때도 이 옷을 입고 있었어."
나는 사진을 바라보며 잊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사진은 특별한 날이 되어야 찍는 그런 종류의 물건이었고 지금도 나의 일상성에서는 벗어나 있는 편이다. 그래서 사진은 '소비'되지 않고 '추억'될 수 있었다. 수많은 사진이 수시로 찍히며 공유되는 오늘날, 기억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사진이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를 그 시대의 이항억이 그랬듯 난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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