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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혹은 감귤의 감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2. 3.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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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귤 상자가 하나 와 있었다. 감을 보내주겠다는 사촌 누나의 언질을 들었던 나는 감이 왔나보다 하고 말했는데, 그 사실을 잘 몰랐던 아내는 나의 말에 "감귤은 감이 아닌데" 하고 답했다. 아마도 내가 상자에 쓰여 있는 '감귤'이라는 단어를 보고 상자 안에 든 것을 감으로 여긴 것이라 판단한 듯했다. 


나 역시 감귤이 감과 귤, 둘 모두를 뜻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소년이었을 당시 난 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걸 거의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상자에 써 있는 '감귤'이라는 단어를 보고는 '상자에 감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귤을 담기도 해서 감귤이라고 적었나 보다' 하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감 상자 따로, 귤 상자 따로 만들면 비효율적이니 감귤 상자라 통칭하여 사용 능률을 높인 것이라 여긴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감은 감이라 불렀고 감귤은 귤이라 불렀으니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는 어느 시기에 감귤의 감이 내가 익히 알던 그 감, 말리면 곶감이 되는 그 감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구어와 문어의 차이처럼, 사람들이 입으로는 '귤'이라고 했지만 글로는 감귤 혹은 밀감이라 적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어느 시기였을 것이다.



2.

그 뒤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와 같은 착각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은 듯하다. 감귤의 '감'과 '귤'은 모두 한자어로, '감'은 [귤 감]자이고 '귤'은 [귤 귤]자이니, 감귤은 한자어 뜻 그대로 '귤'을 뜻한다. 그에 반해 홍시나 곶감으로 만들어 먹는 '감'은 한자어가 아닌 우리말이다. 이렇듯 '감'은 한글 표기법은 같지만 뜻이 다르다. 


감귤은 밀감이라고도 하는데, 이때의 '감' 역시 [귤 감]자를 쓴다. 밀감은 감귤과는 달리 '밀'과 '감'으로 착각하지 않는 편인데, 밀과 감은 형태가 매우 다를 뿐 아니라 수확시기도 달라 서로 잘 연상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주 쓰이는 용어도 아니니 헛갈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감과 감귤은 수확시기가 겹치는 데다가 감귤이 '귤'이라는 외자로 자주 쓰이다 보니 그런 혼동이 종종 발생하는 듯하다.


인터넷 시대가 되었음에도 그런 착각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의 어느 곳을 보니 감귤의 '감'자를 달다는 뜻의 [달 감]자로 잘못 풀이하는 곳도 있었다. 물론 이때의 '감' 역시 '단' 게 아닌 '귤'을 뜻한다. 과일과 채소 중 [달 감]자를 썼던 것에는 [달 감]자와 [고구마 저]자를 써 '감저'라 했다가 순우리말이 된 '감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3.

감나무는 마을 여기저기서 방임 형태로 키우는 향토적 나무인데, 이 나무가 서울에도 꽤 많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본래 길을 걸을 때에도 주변에 세심하게 눈길을 주지 않는 편(대체로 뭔가 '딴' 생각을 하고 있다)이라 미처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나중에야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중랑천에도 물길을 따라 감나무 수십여 그루가 늘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나무가 도심 속 가로수로 쓰이고 있었다니. 중랑천 옆의 감나무들은 개체마다 한 바구니는 될 듯한 감을 매달고 있었는데, 별도의 관리를 잘 해주지 않아도 열매를 다수 맺는 것을 보아 대기오염에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듯했다. 


제주도는 천연 감염색으로도 유명했는데, 그러고 보면 제주도에도 많은 감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염색이 지방 특색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근래에 제주도에서 한 달이 훌쩍 넘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감나무를 자주 보지는 못했기에 문득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제주도에서는 가구당 보통 감나무 1,2주씩은 심고"[각주:1] 있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제주도에서 감나무를 많이 보지 못한 것은 필경 내가 주변의 나무를 유심히 관찰하지 않은 탓일 게다. 우리 가족은 주로 봄이나 여름에 제주도를 방문하였으니 감나무엔 아직 감이 없었고, 그래서 난 그 옆을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으리라. 내가 지난 달 제주도를 방문했더라면 제주도를 붉게 물들인 감나무 가지를 보며 제주도를 '노란 감귤의 섬'이 아니라 '붉은 감의 섬'이라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와 사촌 누나가 보내준 감. 잘 씻어 널어 두었다. 2017.12. 2.


중랑천변에 가로수로 심어져 있던 감나무들. 감이 열리기 시작했다. 서울시 묵동, 2017. 9.24.

  1. 최영전 저, <한국민속식물> (아카데미서적 1997), 26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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