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를 건너 바로 오른편에는 장충단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비석 두 개와 석등 두 개만이 조촐하게 자리하고 있는 장충단이지만, 태초엔 을미사변 때 명성왕후를 보호하다 순국한 영령들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던 거대한 부지였다.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 있어서 장충단이라 했으니 이는 곧 대한제국 최초의 현충원이다. 현재의 장충동이라는 동명은 이 장충단에서 왔다.
지금의 장충체육관, 신라호텔, 국립극장, 제이그랜하우스(옛 남산자유센터) 등이 서 있는 곳을 모두 포함했던 장충단은 일제강점기 시절 비석이 뽑힌 뒤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의 사후에 그를 기리는 박문사가 사당 동쪽 언덕에 장충단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세로 자리하면서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광복 직후엔 박문사가 (아마도 어느 분노한 백성이 지른) 화재로 소실되었던 바, 이제 장충단은 원래의 쓰임이었던 국립묘지로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동작동에 현충원이 들어서면서 장충단은 개발의 명분 아래 놓이게 되었으니, 육군체육관(현 장충체육관)을 시작으로 영빈관, 신라호텔 등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장충단 부지는 상당히 줄어들게 되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몰려 들었던 80만 명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던 장충단은 이제 예전 위치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자리에 작은 비석으로만 남아 있다. 1
비석 앞면에는 '장충단'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쓰여 있었다.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글씨라 하는데, 단 세 글자에 불과했지만 서체의 장중함에서 비장미가 스며나오는 듯했다. 비석 뒷면에는 민영환이 임금의 칙명을 받아서 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가 1905년의 을사늑약에 대항하여 자신의 명함 앞뒷면에 유서를 남긴 채 자결을 결행하기 5년 전의 일이었다.
장충단의 비석을 기점으로 하여 장충단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점심시간 즈음이었지만 추운 날씨 때문인지 공원에서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원의 단풍은 꽤 멋들어진 편이라 천천히 구경하며 걷기에 나쁘지 않았다. 공원 끝에서 마주친 한식당은 자못 잘 꾸며져 있었으나 장충단공원의 내력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공원을 돌아나오는 길에는 볼 수 있었던 이준 열사의 동상과 독립운동 비에서 장충단의 옛 의미를 되살려 보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광희동 사거리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밖으로 나오려는데 비가 점점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산 하나만 가지고 있던 우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경동교회로 향했으나 교회의 모든 문이 단단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광희문이 아닌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곧장 걸어가야 했다. 그날의 다음 일정을 모두 취소한 채. 언제 또 이곳을 찾아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충단비. '장충단'이라는 글자가 전서체로 쓰여 있다.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수표의 비문을 읽고 있는 아내.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장충단공원의 단풍.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장충단비 뒤편에서 바라본 장충단공원. 사진 왼편으로 신라 호텔이, 멀리 남쪽으로 남산 철탑이 보인다.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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