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1월 10일, 그날 답사하기로 계획한 곳은 동대문구 일대였다. 그 중에서도 광희동 사거리 일대와 세운상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이 주변은 김수근이 설계한 남산제이그랜하우스(옛 남산자유센터)와 역시 김수근이 설계한 경동교회, 리모델링을 마친 장충체육관, 광희문, 남소문 터, 박문사 터, 수표교 등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들 중 무엇을 돌아볼까 고민하다가 아이를 안은 채 걸어야 하는 상황(언덕을 올라가긴 쉽지 않을 듯했다)을 고려하여 동선을 짰다.
그날 오후에 궂은 날씨가 예보되어 있었지만 원래 계획한 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2017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 가보려고 몇 달 전부터 계획했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비엔날레가 종료되어 버린 걸 알게 된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난 그 일로 크게 상심해 있었던 터라 날씨를 핑계로 또 다시 계획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다만 한번에 많이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흥인지문 부근을 기점으로 해서 광희문, 경동교회, 장충단, 수표교까지 본 후 곧장 세운상가 쪽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2.
버스에서 내릴 때부터 날씨는 심상치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그야말로 추풍낙엽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품에 아이를 안은 아내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첫 답사지로 정했던 광희문을 실수로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는데, 다시 돌아갈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장충단공원까지 걸어간 후 돌아오는 길에 광희문과 경동교회를 들르기로 했다. 기도하는 손, 혹은 횃불 모양을 한 경동교회를 길 건너에서 잠시 바라본 후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동교회를 지나쳐 조금 더 내려가자 빵집이 하나 나왔다. 아내는 꽤 유명한, 오래된 빵집이라고 했다. 이름은 태극당. 어떻게 알고 있었으냐 물으니 언니가 이곳에서 빵을 사다준 적이 있다고 했다. 빵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들어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라는 유서를 잊지 않으려는 듯, 금색으로 치장된 세련된 내부엔 약간이나마 역사의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빵집의 맛을 안 볼 수는 없었다. 얼른 가야되지 않느냐는 아내의 말을 뒤로 한 채 빵 몇 개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답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고 계획한 장소를 모두 둘러볼 시간도 부족했지만 항상 사람이 먼저일 수밖에 없다. 아이를 안고 있는 아내에게 휴식 시간을 주고 또 설탕으로 기운을 돋아줄 심산이었다. 떡을 더 좋아한다고는 하긴 했지만 나 못지 않게 빵도 좋아하는 아내였다. 2층에서 바라보니 맞은 편에 스타벅스가 보였다. 1946년에 첫 문을 열었다는 태극당과 현대적 커피숍의 대명사인 스타벅스가 서로 마주한 채 묘한 대비를 이루는 듯했다.
태극당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장충체육관이 보였다. 한때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철거설이 나오기도 했지만 2008년에 철거된 동대문운동장과는 달리 계속 존속시키기로 결정이 되었고, 2015년의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말끔한 모습으로 서 있다. 장충체육관은 동대문운동장과 함께 20세기 중후반에 우리나라 체육을 이끈 산실이었으니 지금도 DDP 주변에 스포츠 용품점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 즉 DDP로만 알고 있는 세대는 그 주변의 오래된 스포츠 용품점들을 보며 이들이 왜 이곳에 모여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죽도 같은 검도 용품을 살 일이 생기면 DDP 앞 스포츠 용품점을 찾는다.
흔히 우리나라 건축 1세대, 하면 김수근과 김중업을 떠올리는데, 장충체육관은 우리나라 건축 0세대라 할 수 있는 김정수가 설계한 건축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체육관이다. 즉 국내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돔이 있는 체육관이었으니, 어떤 이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국회의사당의 돔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혹시 경기를 하고 있나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모든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요즘에는 평일에만 운영을 하고 있는 듯했다. 이제 장충체육관 맞은 편에 있는 장충단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답사의 주요 목표는 수표교와 장충단이었다. 1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경동교회. 고대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연상시키는 교회 벽체와 기둥 모양의 구조가 이채롭다. 외부에서 십자가도 보이지 않기에 천주교 성당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경동교회는 그 이름처럼 개신교 교회이다. 김수근의 설계로,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게 만든 구조는 우리나라 교회 건축물 중 특기할 만하다.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태극당의 계산대에 놓여져 있던 '카운타' 표시판. '납세로 국력을 키우자', '계산을 정확히 합시다'라고 씌여 있다. 납세가 곧 국력이라는 것은 70년대 초의 대표적 표어였다.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재단장한 장충체육관. 그 모양과 빛깔에서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가 연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서울시 장충동,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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