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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아름다웠던 건축물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9. 25.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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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축물이 철거되곤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재건축으로 용적률을 최대한 채워 이윤을 남기려는 게 가장 흔한 이유일 테지만 제주도의 '카사 델 아구아'처럼 불법 건축물로 간주되어 철거되기도 하고 서울 시민아파트처럼 부실공사로 철거되기도 하며 히틀러 생가처럼 정치적인 이유로 철거되기도 한다. 전주의 옛 전북도청사나 경복궁의 조선총독부 건물처럼 전통의 복원을 위해 허는 경우도 있으며 경복궁의 옛 관문각처럼 철거된 이유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관리 부실로 철거되는 경우도 있는데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스트 아이고'가 대표적일 것이다. 난 여기에 문훈 소장이 운영하고 있는 '문훈발전소'의 첫 작품을 포함시키고 싶다.


우리나라에 독자적인 건축 역사를 세우고 있는 건축가 문훈의 데뷔작이 서울 묵동에 있다고 하여 찾아보았다. 일명 '망사스타킹 집'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건물이어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그런데 웬걸, 그 건축물은 이미 철거되고 없었다. 데뷔작이라 하면 기념비적인 것이고 그래서 애써 시간을 들여 찾아본 것인데 이미 사라지고 없다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인터넷 지도 검색 서비스를 이용하여 그 건물의 옛 모습을 어렵사리 찾아보았다. 그곳엔 망사스타킹 집의 옛 모습과 신축 건물이 들어서는 모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의 첫 작품이 헐리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역시 돈일 것이다. 아마도 건축주는 대지의 용적률에 맞춰 건물을 최대 한도로 높인 뒤 그를 통한 이윤을 끌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관리 부실이다. 


문훈발전소의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는 망사스타킹 집의 모습은 매우 깔끔했다. 그건 당연한 일인데, 그 사진은 건축물의 준공 전후 모습을 담은 것으로 순수의 상태를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가적인 전기선이 건물 외벽에 늘어지기 시작했고 설치 구조물들은 하나 둘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벽에는 광고 스티커마저 나붙었다. 


임대사업을 하는 사람이 건축가에게 건물 설계를 맡기는 이유 중 하나는 건물의 미적 감성이 임대율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차인은 물론 그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이 건물이 미적으로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뭔가 음습하고 기이하다 여기지 않았을까. 엘리베이터도 없는 3층 건물의 공실률은 점점 높아졌을 테고 임대인은 임대료를 낮추다가 뭔가 결심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처음 지어졌을 당시 업계의 주목을 받았던 '망사스타킹 집'은 지어진지 10년 만에 철거되고 말았다. 문훈 소장은 자신의 첫 작품이 헐리어 사라져버렸다는 걸 알고 있을까?


문훈 소장의 데뷔작인 '망사스타킹 집'. 사진은 철거를 1년 앞둔 2012년의 모습이다. 유지보수가 잘 되지 않아 무언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다음 로드뷰 제공.




2.

오늘은 다세대 주택 밀집 구역에 세워져 있는 한 협소주택을 찾아갔다. '강남구 아름다운 건축상'을 수상한 이력이 있는 건축사무소의 설계작이었다. 그러니 기대가 컸다. 미리 찾아본 건물의 이미지는 무척 아름다웠다. 노후된 다세대 주택 사이에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하얀 집은 내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직접 보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그런데 내 눈을 맞이한 것은 관리되지 않은 더러운 외벽과 그 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전깃줄 덩어리였다. 전깃줄은 어쩔 수 없다 하겠지만 외벽은 실망스러웠다. 스타코 단열재는 수축 때문인지 여기저기 갈라져 있었고 그 틈은 실란트 등으로 불규칙하게 메워져 있었다. 무엇보다도 때가 탄 외벽은 이 건축물의 독특함을 완전히 무색게 하고 있었다. 스타코는 때가 잘 타는 데도 불구하고 창문에 빗물받이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고, 그 때문에 물이 창문을 타고 물이 흘러 내리면서 창 아래 부위를 시꺼멓게 망치고 있었다. 이 건물을 설계한 건축가는 건축주에게 외장재의 특성에 대해 조언을 해주지 않은 건가? 빗물받이가 건축미를 손상시킬까봐 애초에 설계에서 제외해 버린 것은 아닐까? 아니면 건축가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시공비 때문에 건축주가 무시해버린 것일까? 


난 일부 건축가들이 대외에 드러나는 건축물의 첫 모습에만 집중하고 유지보수에는 무관심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물론 유지관리는 건축주의 몫이지만 그걸 더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조언해 주는 것은 건축가의 임무 중 하나이다. 그걸 무관심하게 내버려 둔다면 건축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흉물로 남을 수밖에 없다. 


한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협소주택. 빗물자국으로 더러워진 스타코 외벽이 건축미를 손상시키고 있었다. 건축상 이력이 있는 건축사무소의 작품이라 보기엔 실망스러웠다. 서울 묵동, 2017. 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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