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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치미, 기억된 맛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6. 7.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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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치미에 대한 어떤 인상이 내게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암실의 붉은 빛에 대고 바라보지만 어렴풋하게 보일 뿐인 필름과도 같았다. 난 기억의 필름을 제대로 인화해 보고자 했지만 루페를 대고 자세히 들여다 봐야 할 필름컷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태였다. 라이트 박스에 아무 필름을 올린 뒤 루페로 들여다 보았지만 그것은 내가 찍은 광경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기억은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가 기억을 쇠퇴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토트 신과 이집트 왕 타무스의 대화를 빌려 표했었고 그의 우려는 일부 현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난 "기억은 영혼의 필경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마음이 더 쓰였다. 문자로 남긴 기록이 없던 나는 뒤져봐야 할 기억의 창고조차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곤 했다.

몇 년 전 마트에서 동치미를 샀던 것은 그때의 그 어렴풋한 기억 때문이었다. 하지만 비닐을 뜯어 내용물을 그릇에 부었을 때 그리고 맛을 보았을 때, 난 그렇게 두 번이나 실망하고 말았다. 건더기는 너무 적어 단 몇 개밖에 되질 않았고 맛도 내가 생각하던 맛과는 달랐다. 그 뒤로 난 동치미를 잊고 살았다. 꽤 오랫동안.

그런데 대체 무엇이 계기였을까. 동치미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비참한 처지의 오디세우스에게 옛일을 떠오르게 해주었던, 그래서 그의 실체를 드러나게 해주었던 데모도코스의 음악처럼 동치미는 내 발견을 위한 하나의 기억, 하나의 단초였던 것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 기록해 둔 것처럼 기억에 의한 발견이 "한번 보고서 바로 알아차리게 되는"[각주:1] 성질의 것이라면 난 이미 실패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 실패는 시인의 창작에 놓아 두기로 했다. 현실의 기억은 필연적으로 상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니.


2.

마트에서 동치미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사왔다. 내 팔뚝만한 무, 생강, 실파, 마늘, 양파, 배.  나머지 재료, 즉 설탕, 멸치액젓, 맛술, 소금은 집에 있는 걸 썼다. 동치미는 보통 오랫동안 담갔다가 먹는데 난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가 없었다. 한편 '즉석' 동치미는 바로 맛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깊은 맛이 부족할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난 이 두 방식을 섞어 만들기로 했다. 즉 만들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지만 또 냉장고에 숙성시켜 먹을 수도 있는 동치미를 만들어 보기로 한 것이다.

일단 재료를 다듬었다. 무는 깨끗이 씻은 뒤 껍질을 벗기고나서 1kg와 300g의 두 덩어리로 나누었다. 1kg은 숙성시킬 용도였고 300g은 으깨서 바로 맛을 낼 용도였다. 1kg의 무는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뒤 소금을 3큰술을 넣어 1시간 동안 절였고, 300g의 무는 으깨기 좋은 크기로 잘게 잘랐다. 마찬가지로 생강 한 덩어리도 전체적으로 편을 썬 뒤 일부는 으깨서 바로 맛을 낼 용도로 남겨 두었다. 그런 식으로 배 두 개도 잘라서 일부는 갈아낼 용도로, 일부는 숙성시킬 용도로 나누었다. 이처럼 갈아낼 용도로 남겨둔 무, 생강, 배, 그리고 양파 한 개를 물을 한 컵 넣은 뒤 함께 갈았다. 이것이 즉석 동치미의 핵심이다. 이렇게 갈아낸 것을 체와 면포로 걸러 되도록 맑은 국물만 내려지도록 했다. 

위에서 걸러낸 맑은 국물과 물 11컵, 절인 무에서 나온 즙, 멸치액젓, 맛술, 설탕을 큰 그릇에 섞었다. 편 썬 생강과 편 썬 마늘은 다시백에 넣고, 썰어둔 배, 무, 실파와 함께 큰 그릇에 담갔다. 이들은 천천히 우려낼 용도였다. 이렇게 만들어 냉장고에 이틀 동안 넣어 둔 뒤 저녁 식사 때 일부를 꺼내어 그릇에 담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어 보았다. 동치미에 관한 아련한 맛의 감흥이 되살아 나는 듯했다.

그릇에 담아낸 동치미. 2017. 6. 7.

  1.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54 b 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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