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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과 WD-40. 넘어지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 사람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6. 3.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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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황산

최근 은(ag)에 붙은 산화물을 제거하기 위해 가루로 된 황산을 구매했다. 금속공예에서 묽은 황산 수용액[각주:1]은 금속에 발생한 산화물을 제거하는 용도로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는데, 이러한 세척용 산은 가열된 상태에서 더 빠른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최근 반지 공방과 같은 금속공예소가 인기를 끌면서 공방에서 기술을 배운 뒤 집에서 직접 산화물 제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가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부주의한 방식으로 황산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인터넷에서 본 어떤 사람은 끓고 있는 황산 수용액을 이용하여 산화물을 제거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가열된 상태의 황산은 산화물 제거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효과가 있기에 수용액을 가열하는 것인데, 문제는 황산이 유독성 물질이라는 점이다. 묽은 황산 수용액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끓이게 되면 끓는 즉시 산이 기화하면서 황산의 증기가 실내에 퍼지게 된다. 물과 섞은 황산이라고 해서 끓였을 때 순수한 물만 증발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별다른 경각심 없이 자신들의 취미생활을 집에서 영위하고 있었다. 내가 실제로 위와 같은 행위를 목격한 것은 단 한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숫자가 적으리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금속공예, 특히 취미로 은반지를 만들고 있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묽은 황산 용액 수용액을 알코올 램프로 가열한 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황산 수용액이 끓기 전에 알코올 램프에서 불을 제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앞서 언급한 '가루로 된 황산'이라는 것은 외국에서 스파렉스(SPAREX)라고 부르는 제품과 동일한데, 이것은 용액 상태의 황산이 튀거나 바닥에 쏟아져 생기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황산을 가루 형태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험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피부, 눈, 옷 등과 접촉을 시켜서는 안 되며 가루를 들여마셔서도 안 된다. 그런데 내가 구매한 가루 황산에는 그 어떤 위험성도 표기되어 있지 않았으며, 단순히 '가루 유산[각주:2]'이라고만 겉에 써 있을 뿐이었다(판매자가 스파렉스를 대량 구매한 뒤 판매를 위해 작은 용기에 소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업체만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알아본 종로의 재료상가들은 모두 그런 형태로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2. WD-40

인터넷으로 철제 물건을 받아보면 가끔씩 철 부위에 기름이 잔뜩 발려 있는 경우가 있다. 녹이 발생하는 걸 막기 위해서 혹은 이미 발생한 녹을 제거하기 위해서 바른 방청유일 것이다. 이때 최초에 당면하게 되는 문제는 이게 정확히 무엇인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공업용 기름일까? 테프론 오일? 녹 방지를 위해 시판되고 있는 전용 제품일까? 일단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WD-40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럼 판매자가 멀쩡한 물건에 굳이 사비를 들여 WD-40을 뿌릴 가능성은 낮으니ㅡ물론 녹이 아주 쉽사리 생기는 재질이라면 예방 차원에서 방청유를 듬뿍 발라두기도 한다ㅡ아마도 제품에 녹이 슬어 있어 WD-40을 뿌린 것이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철에는 녹슨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았고 기름은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녹을 제거해 준 것에 대해 내가 고마워해야 할까? 이 제품이 WD-40을 잘 모르는 구매자에게 갔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제품에 잔뜩 발려 있는 갈색 액체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부주의하게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질 가능성이 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끈적끈적한 기름을 곧 씻어낼 테지만 그동안의 피부 접촉이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갑자기 눈가가 가려워 무심코 그곳을 손으로 긁게 되지는 않을까?


WD-40의 MSDS[각주:3][각주:4]를 살펴 보면 어렵지 않게 이 물질의 위해성을 알 수 있다. 피부 접촉만 하더라도 15분 이상 물과 비누로 씻어내야 한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체에 유해할 수도 있는 방청유가 아무런 표기도 없이 잔뜩 발려진 채 배송되고 있는 걸 보면 사람들의 안전의식이라는 게 어떤 상태인지를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알고서도 부주의한 경우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하겠지만 그게 무언지도 알지 못한 채 사용하는 소비자들은 (마치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될 우려가 있었다.



3.

생산자든 소비자든ㅡ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ㅡ사람들은 안전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편이다. 우리는 넘어지는 방법을 배우지 않은 채 리프트에 오르는 스키 초심자와 같았다. 초심자를 가르치는 선배는 "괜찮아, 문제없어. 일단 올라와"라고 말하고, 배우는 사람은 걱정을 하면서도 그의 말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초보자와 함께 리프트에서 내린 선배는 스키 타는 법을 잠깐 알려준 뒤 혼자서 휙 내려가 버린다. 자신도 그렇게 배웠다는 과거의 무책임한 유산을 그럴 듯한 전통으로 변질시키며. 나는 스키를  처음 탈 때 슬로프엔 올라가지 않은 채 평지에서 넘어지는 법부터 배웠다. 그러고 나서 일어서는 법을 배웠다. 운이 좋았던 걸까? 그렇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선배로 좋은 사람들을 만났으므로. 꼭 스키만이 아니다. 어떤 운동이든, 어떤 운전이든 우리는 멈추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는 법과 출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심지어 인생 그 자체마저도. 그러니 부디 우리에게 운이 따르기를, 우리에게 조언과 당부를 유약한 불안으로 간과하지 않는 지혜가 깃들기를 바란다.



  1. 보통 물:황산을 9:1 정도의 비율로 희석해서 사용한다. [본문으로]
  2.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업계와 현장에서 황산 대신 유산(硫酸)이라는 일본식 표기를 사용하고 있다. 황산으로 표기해야 옳다. [본문으로]
  3. 물질안전 보건자료(Material Safety Data Sheet). 화학물질의 안전한 사용과 관리를 위해 제품명, 성분, 취급상의 주의, 사고 시의 응급처치방법 등을 기재해 놓은 문서. 화학제품을 사용하는 사업장은 산업보건안전법에 의거하여 MSDS를 작성한 뒤 근로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본문으로]
  4. 위에서 언급했던 스파렉스의 MSDS는 다음의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s://contenti.com/media/catalog/pdf/msds/510-871_etc.pdf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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