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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릴 프레스와 사람들의 취향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6. 2.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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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베르토 에코는 듣고 있는 이의 의사는 고려치 않은 채 느닷없이 축구 이야기를 꺼내곤 했던 이탈리아 택시 기사들의 특성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여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 1위가 남자들이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걸 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단 하고 보는 사람들의 습성에는ㅡ그리고 그 항목 중 하나가 축구라는 것에는ㅡ비슷한 면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만일 움베르토 에코가 축구에 매우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친구가 군대를 잘 모르는 여자가 아니라 열성적인 축구팬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제가 아니라 상대방의 취향인 셈이다. 

그러니 내가 다소 거대한 몸집의 드릴 프레스를 집에 들여 왔을 때 아내가 내게 보였던 반응, 즉 "부부싸움 안 할 걸 다행으로 알아"라는 반응에 섭섭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아내는 분명 드릴 프레스라는 용어조차 생소했을 것이다. 몸집도 큰 데다가 생긴 것마저 우악스러운 이 쇳덩어리에 기분 좋은 감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아무리 이 기계가 손으로 어렵게 원을 그리던 사람에게 마치 컴퍼스가 주어진 것 같은 놀라운 효과를 준다 하더라도 당면한 반응은 이런 것일 터였다: "원을 잘 그려서 뭐하게?" 원을 정확하게 그리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설명하더라도 다음엔 이런 반응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원을 얼마나 자주 그려야 하는데?" 이런 질문은 원초적인 문제, 즉 의식주의 문제로까지 연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의식주 및 본인의 직업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다 불필요한 물건이라는 주장 말이다. 물건 하나를 들이기 위해 그런 문제까지 나아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선택의 순간이 되면 그런 질문에 당면하고 만다. "과연 이게 진짜로 내게 필요한 물건일까? 유용하다고 하더라도 자주 사용할 수는 있을까?"

놀랍게도 일상적인 그 질문은 실은 철학적인 물음과 다를 바 없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철학시험에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가 있는데, 이 어렵게 느껴지는 철학시험의 질문을 다음처럼 바꿔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사려고 하는 이 물건은 사용 기간이 짧아. 게다가 자주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어. 그래도 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영구적일수록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반대의 것일수록 폄하하는 것이 최근의 현상만은 아니다. 이미 플라톤은 영구적인 가상의 이데아만이 가치 있고, 우리가 속한 현상계는 일시적이므로 무가치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물질계를 정의내릴 필요는 없지만, 오늘날 사람들이 아파트나 자동차처럼 오랫동안 가치와 지속성을 유지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보면 행동 속성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여전히 고민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녕 내게 필요할까? 지금 내가 사려고 하는 이것이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그 어떤 것은 아닐까?

나 또한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 년 동안 못과 나사못을 어긋나게 박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시간과 목재를 낭비했고 또 스트레스를 받았으면서도 그냥 넘어갔던 것이다. 드릴 프레스가 없어서 아쉬웠던 건 바로 그때뿐이었다. 그때라는 것은 일시적인 시점이었고 그래서 간과하게 되었다. 하지만 또다시 '그때'가 찾아와 내 방문을 두드리면 난 같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드릴 프레스가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 감정에 빠질 때마다 난 현재를 놓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란 엄격한 의미에서 일시적이고 순간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일시적인 것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일 때 우리의 삶 자체가 어떤 두께를 얻게 된다."[각주:1]

위에 제시한 문장은 정답이 아니다. 철학엔 정답이 없다. 따라서 위의 문장도 얼마든지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그럼 도박 중독자들이 자신의 인생을 그런 식을 정당화하며 낭비한다면 무어라 대답할 건데요?" 하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 질문과 대답은 끝없이 이어지는 게 가능하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그런 끝나지 않을 질문을 굳이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타인의 이해를 구하는데 그 이해라는 것은 대개 경험의 공유에서 우러나고, 그 경험의 공유란 일반적으로 공통의 취향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취향의 공유가 꼭 같은 경험의 공유로 이어지진 않지만 적어도 그런 가능성을 높여 주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취향을 공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 개별적일 수밖에 없다. 즉 망치조차 몇 번 손에 들어본 적이 없는 아내는 드릴 프레스가 내게 가져다 줄 신기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드릴 프레스는 남성이라고 해도 이쪽에 꽤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잘 알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그러니 "부부싸움을 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라"는 문장은 단순하지만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표현이었다. 아내와 난 취향을 공유하지 못했다. 문제는 주제가 아니라 취향인 법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ㅡㅡㅡ질문을 멈췄던 것이다.

용수 드릴 프레스 YSDM-100. 2017. 6. 1.


  1.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최병권 외 엮음 (휴머니스트 2003) 32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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