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선'이라는 단어는 실생활에서 종종 쓰이고 있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그 땀내 나는 세계에서 조금 떨어져 지내온 사람들에겐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만한 단어였지요. 저는 설악산에서 들어가고 나서야 영선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맡았던 업무 중 하나에 시설 분야가 있었는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선 영선반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움직여야 했습니다. 영선반과의 업무는 거의 대부분이 몸을 써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를 두드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체력을 소모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영선반에 속한 일들이 그리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걸 뜻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몸을 써야만 하는 직업을 좋게 평가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영선반 직원들은 거의 모두가 비정규직이거나 계약직 혹은 무기계약직이었습니다. 어쩌면 저 역시 영선이란 업무를 그렇게 비전문적이고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을지 모를 일입니다. 제게 있어 영선반의 일은 힘든 육체 노동이 아닌 즐거운 배움의 현장으로 실세계에 우뚝 서 있었지만, 어쩌면 그것은 제가 그 세계를 저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진 호기심의 대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만난 영선사 현판은 비록 위계가 낮은 전각에 쓰이는 분질묵자(분칠바탕에 먹 글자)의 형태였지만, 사변에 테두리를 두르고 장식을 더하여 자신의 처지에 차분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습니다.
영선사 현판. 왕실의 토목, 영선을 관장했던 영선사에 걸었던 편액. 1895년.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르네상스 이전의 화가들, 중국의 화가들은 눈으로 본 것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그렸으며, 눈으로 본 것을 그린다고 믿기 시작한 이후에도 실제의 것을 그린다기보다는 배움과 관습의 형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들은 양식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E. H.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습니다. "미술가는 자기가 보는 대로 그리기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그리는 대로 보는 경향이 있게 마련이다." 미술이든 건축이든, 혹은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내 마음 속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이든, 그것이 모든 양상에서 객관적일 수는 없었습니다. 온전한 객관성을 믿는 경우란 대개 자기자신을 자신이 바라보는 경우였지요.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고 있다고 합니다 1.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를, 그리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의 모습을 그려냅니다. 어쩌면 실제로 본 적도 없는 상대방의 모습을 말이지요. 제가 바라보려 하는 타인의 이미지는 이미 제가 상상하는 대로 도화지 위에 그려져 있고, 저는 그 그림을 본 뒤에 그 사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됩니다. 2
"저 사람은 저래. 저 남자는 원래 저래. 저 사람은 나를 항상 원망하고 있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나는 불행할 거야."
오늘도 사람들은 양식의 틀 안에서, 과학자라면 패러다임이라고 부를 그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틀을 벗어나려는 사람은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사람들은 그 대가를 두려워하기에 그것을 벗어날 생각을 감히 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요. 물론 양식의 틀을 한꺼번에 깨버리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작가는 독자를 필요로 하는 법이고, 우리는 우리를 이해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법이니까요. 우리와 너무 다른 상반된 태도는 설령 그것이 옳다고 하더라도 옳게 느껴질 수 없다는 것이 오랫동안 증명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양식의 틀에서 한 발, 패러다임의 바깥으로 한 발, 인습의 외곽을 향해 단지 한 걸음 더. 오래전 저는 백지 위에 당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고, 이제 당신은 다가와 자신과 비교해 봅니다. 아마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전 재능 있는 화가가 아니니까요. 심지어 객관적인 화가도 아니었으니까요.
"이건 나와는 영 다른 걸." 하지만 전 우기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 완전 똑같지." "이런 그림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칠 수가 없어."
의견은 좁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의 얼굴을 먼저 그려 넣어야 합니다. 실제 모습과는 영 다르겠지요. 이제 우리의 얼굴에서 턱선 하나, 주름 하나를 실제와 비슷하게 바꿉니다. 우리, 스스로를 누구보다 도덕적이라 믿는 우리는 그제야 겸허하게 혹은 호탕하게 우리의 실수를, 당신의 실력을 인정합니다.
특별전시실의 출구 근처에 걸려 있던 <강화부궁전도>는 전각을 바라보는 시선과 부속 건물을 바라보는 시선이 서로 같지 않았고, 뒤쪽의 나무가 앞의 전각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어째서 조선시대의 이 화가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던 걸까요. 전시실의 출구 옆, 거의 마지막 그림에 이르러서야, 전 그 이유를 바로 저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강화부궁전도(1858~1866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복제품). 국립고궁박물관 특별전. 2017.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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