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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예술의 미와 윤리의식(2)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0. 29. 16:25

본문

1.

주관적인 요소가 가장 가치 있다고 보는 표현주의적 태도를 건축 분야에서도 견지할 수 있겠지만 건축의 공간은 대개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기에 그런 관점엔 제약이 가해진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그의 상상력을 펼치는 장소는 화폭이라는 제한된 틀이기에 거실 한쪽에 걸려 있는 그 작가의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저 치워버리는 것만으로 간단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번 짜여진 건축물과 실내 장식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다. 만일 퇴계 이황이 자신만이 주로 거주할 서당이 아니라 대가족 모두가 기거해야 하는 공간에 성리학적 의미를 부여한 건축물을 지으려 했다면 그는 그의 사상을 생활공간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구성원으로부터 적지 않은 눈총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보들레르는 소네트 <교감(Correpondences)>에서 낭만주의의 주관적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우리가 풍경이라고 부르는 나무, 산, 물, 집과 같은 것들의 조합이 아름답다면,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나 자신의 호감과 호의를 통해, 즉 내가 그 조합에 부여한 관념이나 감정을 거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각주:1]


표현주의자들은 아름다움이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게 아니며, 자연 같은 고전적 대상 역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가치 기준을 적용 받는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은 오늘날 대중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비교적 작은 크기에 불과한 미술품의 전시 여부를 두고 집안에서 설전이 오가는 것은 크게 보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니 아름다움이 집의 구조나 인테리어라는 커다란 틀에서, 그것도 남과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생각이 주가 되어 발현된다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지 명백하다.



2.

퇴계 이황과 내가 집을 정돈하는 행위는 말끔함이라는 결과물에서는 동일하나 의도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퇴계의 경향으로 볼 때 그의 행위는 사상적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나의 행위는 철학적 사상과는 별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작품은 그 자신의 윤리적 성향과 연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은 나의 행위와 퇴계의 행위가 궁극적으로 동일한 미를 추구한다는 생각에 반발할 것이다. 결과물을 비슷할지 모르나 그들이 주장하는 예술적 진리에서 나는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참된' 예술 작품은 작가의 인간성이 더해져 완성된다고 믿는다. 예술 작품을 단지 노련한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관찰자의 정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무엇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이유는 확연하다. 퇴계 이황뿐 아니라 우암 송시열이 여러 번 자기 집을 지었던 것도, 충재가 종택 옆에 자신이 머물 공간을 직접 만든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관찰자 혹은 예술가 그 자신은 단순히 작품에 보이는 기교에 감명하는 게 아니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예술 작품에 평범한 인간이 추구하는 그 이상의 정신이 엿보였기에 감탄하는 것이다. 결국 예술이 아니라 오직 위대한 예술만이 인간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 우암과 퇴계는 사상이 담긴 거주 공간, 정신이 살아 있는 생활 양식을 결합하여 숭고한 가치, 위대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다.


오늘날 현대 미술을 포함한 많은 대중 예술이 외면 받고 쉽게 잊혀지는 것은 그곳에 인간 정신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의 도움이 없어도 예술 작품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인공지능 시대의 정밀한 예술품과 구분되지 않기 시작할 것이다. 인간에게 의식은, 도덕성이라는 것은 그것이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것이든 후천적인 습득에 의한 것이든 기본적인 인간 조건에 해당한다. 따라서 미에서 윤리적 의미나 사상, 혹은 인간성과 연관된 어떤 단초를 찾아내고자 하는 일을 특이한 시도로 여길 이유는 없다. 예술 작품에서 의식을 분리한 뒤 예술 작품만을 독자적으로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3D 프린터로 복제해낸 상품, 코끼리가 그려낸 회화를 예술로 인정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열성적 관찰자는 예술작품에서 도덕성을 배제시키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 어디에나 숨어 있을 의식을 찾아내는 데 열중한다(그렇기에 집안의 정돈이 기계적인 결벽성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결벽이 내놓은 결과물은 오히려 비인간성을 떠돌게 한다. 그것은 사람을 밖으로 내쯫는 일이다).



3.

예학적 의도에서 시작된 방 정리와 깔끔함을 원하는 정리정돈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미를 추구하게 되는 이유는의도가 무엇이든 간에정돈된 방이 혼잡한 방보다 인간 의식을 고양하는 데 탁월한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자연은 직선을 만들지 않는다. 고립계 속 자연은 엔트로피를 늘려갈 뿐이다. 정리라는 것은 자연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기에 정리된 무엇은 그곳에 인간의 개입이 있었음을 드러낸다. 결국 정리된 결과물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인간성을 상기시킨다. 어떤 이는 경건함을 위해서, 또 어떤 이는 그저 불놀이가 좋아서 어두운 방에 촛불을 켜두는데, 켜둔 의도는 다르지만 재미로 불을 켜뒀던 사람도 빛이 가하는 어떤 경건한 분위기에 차츰 이입될 가능성이 있다. 그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결국 일종의 경건함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두 행동에 차이를 둘 이유가 없다. 의도가 달랐던 형식이 종국에 유사한 의미를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원효 대사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갈 수 있다고 설법한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라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의 윤리 의식이 모든 예술가에게 훌륭한 인격자가 되라는 의무를 지우지는 않듯, 예술 작품이 이끄는 미의 의식이 모든 예술가에게 철학가가 되라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선한 감정이든 악한 감정이든, 그곳에 관찰자의 의식을 뒤흔들 수 있는 형식이 보인다면 예술로 평가 받을 만한다. 나머지 역할은 관찰자에게 주어진다. 펼쳐진 광야에서 까닭 모를 눈물을 흘리거나 노랑과 남색의 강렬한 대비에서 생의 사명을 느끼는 건 관찰자 개개인에게 달린 일이다. 그리고 그 발견은 의식 없는 사물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4.

팝아트를 예술로 평가하는 오늘날에는 예술과 더불어 '위대한 예술'이라는 별도의 분류가 필요하다. 사실 이것은 이미 오래전 일부 미학자들, 예를 들어 월터 페이터가 '위대한 예술'과 '솜씨 좋은 예술'로 나눠 다루었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것은 예술을 도덕 교육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려는 의도와는 관계가 없다. 문제는 그것이 두려워 아예 인간성을 예술 작품과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태도다. 순간적 재미, 흥미, 호기심, 충격, 이탈, 오묘한 분위기의 창조... 이러한 감정들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을 예술품이라 부를 수 있다. 현대 예술의 즉각적이고 개인적이며 정서적인 표현주의를 예술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들은 점차 '기술'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결국 대중들에게서도 예술의 지위를 의심 받게 되었다. 관객에게 주는 괴리감 자체가 예술이 주는 감흥으로 인정받는 시대이지만, 이런 현상이 더 극대화된다면 결국 현대 예술은 자신들이 버리려 했던 르네상스의 것을 다시 되찾으려 시도하게 될 것이다.



5.

17세기 네덜란드 플랑드르에서 미를 실용성으로 표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 적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는 "민중어에서도 <Schoon>이라는 단어는 미(풍경이나 별이 뜬 하늘의)라는 뜻 외에도 구체적인 <청결함>(집안이나 도구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각주:2]라고 썼다. 그렇게 '미'라는 가치가 청결이라는 실용성과 유용성 위로 내려 앉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실용성과 미를 다소 멀어지게 할 필요가 있다. 집안 정리를 실용적 행위로 볼 수 있을지 명확하게 판단 내리긴 어렵지만, 상태가 점점 어지러워지는 것을 필연적 사건이라 전제한다면 (정돈을 하더라도 결국 다시 난잡하게 변할 것이기에) 정리 행위를 비실용적인 것이라 간주할 수 있을 듯하다. 즉, 과거엔 정돈되지 않은 난잡한 서민의 집을 예술화하고자 했지만 현대에는 선비나 가능한 것으로 보았던 정결의 미를 일반 백성이 추구하는 모습에서 예술성을 찾아낼 수 있다.


퇴계 이황의 도산서당에서 촉발된 변화는 무엇보다도 집을 실용적으로 이용하라는 요구, 특히 서민은 더욱 그래야 하며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의무로부터의 탈피이다. 프랑스의 미술사가인 앙리 포시옹은 "의식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형식을 갖는다는 것"이라 주장했다. 형식을 갖춘 건축물과 그 안의 정돈된 내부를 보며 관찰자는, 혹은 거주자는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 영향을 받는다. 때로는 적극적 관찰자가 되어 의미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 제작자가 되어 직접 무언가를 만들고자 나서기도 한다. 그 일에 신분이나 재산에 따른 제약이 있을 이유는 없다. 의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리는 것이며, 형식이 무의미한 인간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정리된 환경이 만들어낸 형식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과 감응하게 된다. 설령 그것이 '정리된 혼란스러움'을 뜻한다 할지라도.



6.

퇴계가 꿈꾸었던 건축의 이상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미를 드러냈다. 이제 오늘날의 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이상향을 드러내는 그 무엇이 된다.



  1. 솔로몬 피시맨 <미술의 해석> (학고재 1999), 44쪽 [본문으로]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현경 옮김 <미의 역사> (열린책들 2011), 20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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