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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김녕리 한 바퀴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0. 7.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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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 우학당을 나와 근처에 있다는 포구를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우학당을 나서려 하는데 어디선가 타작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곡식 이삭들을 바닥에 깔아두고는 나무 막대기로 마당질하고 계셨다. 깨를 떨고 계신 건가 했는데 여쭤보니 녹두라고 하신다. 난 한동안 그곳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제주의 어떤 여인들은 밭에만 가면 바다가 생각나 해녀가 되었고 또 어떤 여인들은 바다가 무서워 밭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이 분은 어떤 사연으로 여기에 앉아 계신 것일까. 매질 한 번에 녹두 이삭들이 메뚜기처럼 뛰어올랐다.


바닷가는 생각보다 무척 가까웠다. 5분도 걷지 않은 것 같은데 눈앞에 방파제가 보였다. 우학당 아주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예전엔 바다가 지금보다 더 가까웠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해안 일부를 시멘트로 메우면서 예전보다 조금 더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깥어른께선 그 일을 두고 종종 불만을 토로하곤 하셨다 한다.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개발로 인해 점점 망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과연 부두 앞으론 넓은 시멘트 포장길이 나 있었는데 그 크기가 작지 않았다. 


우리는 도로 주변의 건물들을 구경하며 해변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얕은 바닷물로 덮여 있는 작은 해변이었다. 수심이 깊지 않고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는 그 모습이 판포포구에서 보았던 것을 연상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스노클링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아직 유명하진 않은, 아는 사람만 아는 스노클링 사이트인 듯했다. 해변 이름은 '세기알'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기알 해변은 네이버나 다음 지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지역 주민들은 이곳을 세기알 해변이라 부르고 있었다. 세기알 해변은 용암대지를 사이에 두고 김녕성세기 해변과 마주하고 있었다. 우린 세기알 해변 근처의 용암 대지를 잠깐 살펴본 후 차에 올라탔다.



2.

나는 김녕리의 해안도로, 특히 지질 트레일를 따라 차를 몰았다. 그러다 해안가 쪽에 'C' 형태의 특이한 조각물이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그 생김새가 '지질'(Geography)의 'G'처럼 보였다. 저기에 뭔가 볼거리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럼에도 잠시 고민을 했던 이유는 그 조각이 도로에서 적잖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난 아내에게 의사를 물은 뒤 차에서 내렸다. 아내와 아이도 함께 가기로 했다. 


가까이 가보니 조각길 쪽으로 향하는 오솔길이 길게 뻗어 있었다. 사람이 다닌 듯한 흔적이 보였지만 그 이유가 확연히 다가오지는 않았다. 계속 걸으니 'C' 형태의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가보고 싶었는데 그 주변이 모두 염생식물로 뒤덮여 있어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조각상 옆에는 조그마한 건물도 하나 있었다. 대체 뭐하는 곳이지? 멀리서 망연히 바라보며 궁금해 하던 차에 오솔길 옆으로 '제주도 지질 트레일'이라고 써 있는 작은 표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지질 트레일 코스였다. 아마도 과거에 길을 내어 두었는데 염생식물들이 무섭게 자라면서 길을 모두 덮어버린 듯했다. 지질 트레일이라고 되어 있는 곳을 한번 내려다 보았다. 워낙 풀이 무성해서 이곳을 걷고자 마음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였다.


그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너른 용암 대지가 나타났다. 크기가 꽤 컸는데, 아마도 이곳을 보게 하려고 길을 내어 둔 듯했다. 우리는 잠시간 검은 현무암 덩어리 위를 걸어 다니며 용암을 관찰했다. 


우리는 그곳을 빠져 나온 뒤 다시 차를 몰았다. 그런데 채 일 분도 지나지 않아 해안으로 나 있는 작은 길 하나를 또 발견할 수 있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다시 한 번 길을 따라 걸어 보기로 했다. 이번엔 너른 공터가 있었는데 그 공터 끝으로 아주 작은 성벽 같은 것이 세워져 있었다.


"저건 뭐지? 불턱 같은 건가?" 


가까이 가보니 아무런 시설도 없었다. 현무암으로 만든 작은 담장 같은 것이었는데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돌담 너머에도 용암 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었으니 우리는 용암 위를 잠시 걷다가 다시 차로 돌아갔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곳은 '덩개 해안'으로 불리는 제주도 최대 염습지였다. 그리고 내가 돌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환해장성이라고 부르는 제주도의 해안 성벽이었다. 너무 작아서 성벽일거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다음 번에 제주도에 가게 되면 이곳을 다시 한 번 자세히 관찰해 보고 싶다.


우리는 월정리까지 갔다가 다시 우학당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는 당처물 동굴과 용천 동굴을 들렀다. 물론 개방하지 않은 공간이라 들어가 볼 수는 없었지만 입구를 보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3.

우학당에 돌아오니 하늘에 서서히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우리는 철계단을 밟고 우학당 카페의 옥상에 올라갔다. 그곳엔 두 사람 정도가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가 하나 있었다. 아마도 집 주인 두 분께선 때때로 그곳에 앉아 서쪽으로 지는 노을을 감상하셨을 거이다.


어떤 이들은 지는 해를 바라보면 사람이 우울해진다고 말한다. 지는 해가 내뿜는 빛을 받으면 기분이 나빠진다는 사람도 있다. 태양은 평소처럼 돌며 일정한 에너지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건만 인간은 이처럼 감정적으로 그 작용을 받아들인다. 그러니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 의자를 치워버릴 필요는 없다. 이토록 감정적인 인간에겐 뜨는 해의 희망도, 지는 해의 위로도 필요한 법이니. 지는 해를 가리키며 울력성당하던 무리들이 언젠가 그 해를 가리키며 눈물 흘릴 것을 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선 채 지는 해가 베푸는 노을과 그 빛이 스며든 김녕리 마을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옥상에서 내려온 우리는 다시 세기알 해변으로 갔다. 이번엔 서쪽 해안(올레길 20코스)을 따라 조금 걸을 차례였다. 김녕 옛 등대와 도대불, 그리고 철로 만든 카퍼밴드 나비 한 마리가 그곳에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질을 하고 계시는 아주머니. 2017. 8.27.


우학당 앞의 작은 해변, 세기알. 2017. 8.27.


'주상절리' 하면 제주도 중문이 유명한데 조그마한 것들은 제주도 곳곳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은 세기알 해변의 주상절리이다. 2017. 8.27.


김녕성세기 해변 부근에 있는 덩개 해안의 용암 대지. 염생식물에 덮혀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질 트레일 코스가 이곳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덩개 해안은 제주도 최대의 염습지로 지질뿐만 아니라 식물학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2017. 8.27.


용암 표면이 조금씩 밀리면서 형성된 치약 구조가 보였다. 제주 김녕리 덩개 해안, 2017. 8.27.


이곳에서도 조그마한 주상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주 김녕리 덩개 해안, 2017. 8.27.


거북손 같은 생명체들도 잘 살아가고 있었다. 제주 김녕리 덩개 해안, 2017. 8.27.


덩개 해안에서 바라본 김녕성세기 해변. 2017. 8.27.


용천 동굴의 입구. 입구가 이처럼 막혀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발 아래쪽으로 거대한 동굴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만장굴이 나온다. 2017. 8.27.


우학당 옥상에서 바라본 김녕리의 마을. 건물들이 다 비슷비슷한 키를 하고 있다. 왼쪽 끝에 보이는 산은 '서우봉'이다. 맞다, '함덕서우봉 해변'의 그 서우봉이다. 2017. 8.27.


우학당 서쪽 해안길을 따라 걷다 발견한 장식물. 모습이 꼭 카퍼밴드 나비를 닮았다. 제주도에도 카퍼밴드 나비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는데 사실인가 보다. 2017. 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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