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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전히 잼을 만든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1. 13. 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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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져 7세기부터는 아랍인들의, 그리고 그 이후엔 베네체아인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어 주었던 설탕은 서인도 제도의 사탕수수 재배와 19세기 사탕무의 등장으로 가격이 점차 내려가기 시작했다. 상류층의 기호품이었던 설탕이 대중적 소비재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19세기 말, 성능 좋은 밀폐 유리병의 개발과 저렴한 설탕 가격 덕분에 미국 주부들 사이에서 잼을 만들어 병에 담그는 일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때 주로 사용된 설탕은 백설탕이었다. 당밀이나 갈색 설탕은 잼의 색깔을 어둡게 변색시켰기 때문에 과일 잼을 만들 때 적합하지 않았던 탓이다. 이처럼 백설탕의 소비량은 잼은 물론 다른 용도로도 사용되며 급격히 늘어났는데, 미국의 노동자들이 그 주요 소비층 가운데 하나였다. 백설탕은 영양가는 없어도 가격이 저렴하고 맛있는 데다가 순식간에 공복을 해소시켜 주고 칼로리가 높았다. 그 때문에 많은 열량을 소비해야 하는 미국의 가난한 육체 노동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백설탕의 유해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 시절엔 육체 노동 후에 휴식처럼 찾아오는 그 강렬한 달콤함을 거부할 수 있는 노동자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미국에서 잼 만들기 열풍이 일어나던 19세기 말도 아니고, 하루 종일 땀을 흘려야 하는 육체 노동이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는 시대도 아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잼을 만든다. 오래전 서민들이 과일에 비해 저렴한 잼을 '어쩔 수 없이' 만들었다면, 지금의 나는 집에 일순간이나마 '넘쳐나는' 과일들이 썩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잼을 만든다. 1세기 남짓한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잼을 만들 때 여전히 백설탕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건 백설탕이 가장 저렴해서가 아니라 설탕의 색이 잼의 색상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물용으로 잼을 만들 땐 주로 백설탕을 쓰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색이 어둡게 변해버린 사과잼을 선물로 건내면서ㅡ마치 변명처럼ㅡ건강을 위해 정제가 덜 된 갈색 설탕을 써서 색이 이리 되었다고 언급해야만 한다. 그러니 선물 받는 이가 그 점을 이해한다면 다행이지만 따로 설명을 덧붙이기가 선뜻 내키지 않는다면 백설탕을 쓰는 편이 낫다. 대신 과일과 설탕의 비율을 1:1로 하여 넣기보다는 설탕의 양을 과일량 대비 50% 전후로 조절하여 잼을 만든 뒤, 잼이 변하기 전에 빨리 먹으라 권하는 게 좋겠다. 우리는 미국에서 잼 만들기 열풍이 일어나던 19세기 말이나 육체 노동이 사회 발전의 근간이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 않지만, 그렇지만 여전히, 그것이 우리에게 감정적 위로를 주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므로.


사과잼과 귤잼. 사과잼은 백설탕으로, 귤잼은 비정제 갈색 설탕으로 만들었다. 201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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