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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의 시계탑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7. 11. 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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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제법 오래되어 보이는 시계탑이 세워져 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두 개나. 이미 사라진지 오래되어 이젠 구경하기조차 쉽지 않아진 고전적 형태의 시계탑이 한 아파트 단지 내에 두 개나 있다는 사실에 처음엔 그리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난 이 시계탑이 철거되었으면 한다는 의중을 아내에게 몇 번 내비친 적도 있다. 우선 형태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고, 시계탑이 서 있는 좁은 공간이 통상의 시계탑이 상징하는 '광장'이라는 공간과는 격이 맞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시계탑이라는 상징 자체가 이젠 구식이 되어 현대의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유물이라는 생각도 슬몃 들었다. 


한때 시계탑은 도시의 광장마다 서 있던 중요한 랜드마크였다. 손목시계를 대물림하던 1970년대만 해도 사람들은 광장의 시계탑을 보며 약속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경복궁 관문각에 이어 한성전기회사와 대한의원에 차례로 시계탑이 들어서던 약 100여년 전부터 집의 거실을 각양각색의 괘종시계가 장식하던 시절까지, 대형 시계는 야외뿐 아니라 가정집에서도 자신의 위용을 과시했다. 커다란 시계는 천체의 움직임과 신진대사의 알림이 일상의 리듬을 지배하는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하루 빨리 선진국으로 진입하기를 원했던 모든 사람들의 신성한 상징이었다. 당시 시간 개념은 근면성실한 시민을 기르기 위한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 그러니 그를 알리는 시계가 도시 곳곳에 나타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시 '9시 뉴스'는 항상 9시를 알리는 초침소리와 벨소리로 방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절도 이제 과거가 되었다. 지금은 손목시계를 차고 다니는 사람조차 찾기 쉽지 않은 시대이다. 시간이 하찮아져서가 아니라, 이제는 시간이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따라서 시계탑이 서 있는 공간은 도시적 이미지를 알리는 중요한 랜드마크가 아니라 구시대의, 개발되지 못한, 소외된 지역의 상징처럼 남게 되었다. 그 많던 시계탑들은 하나둘 철거되어 이제 시간에 대한 통제와 가르침이 중요한 학교를 제외하면 서울에서도 몇 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난 아파트 입구에서 시계탑을 볼 때마다 이 공간의 정체된 이미지를 목도했다. 그래서 철거를, 그렇게 구시대적 유물이 완전히 사라지길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난 문득 시계탑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오늘날, 이 오래된 구식 시계탑이 도시 안에서 다시 기상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었다. 시계탑이 사라져버린 시대가 되자 추억이 사람을 잡아 끌기 시작했다. 대한의원에 걸려 있던 기계식 시계탑을 기억하는 이는 이제 아무도 존재하지 않지만 청량리역의 옛 시계탑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새로움은 새로운 세대를 맞아들이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갈 것이지만 옛 추억 역시 은근하게, 자신의 녹록하지 않았던 과거를 상기시키고 있었다. 



2.

"예전엔 이 탑이 이런 모양이 아니었단다." 할아버지가 오래된 시계탑 하나를 가리키며 손주들에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다. 시계탑의 옛 모습은 아이들에게 흥밋거리가 아니다. 그 이야기가 학교 시험에 나올 것도 아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한 귀로 흘린 채 재빨리 뛰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를 추억해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 자신들뿐임을 깨닫는다. 


아파트의 시계탑. 서울시, 2017.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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