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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그 1초의 욕구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6. 9. 1.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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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도 훈련. 서울 용산구, 한영숙검도관. 2016. 8.30.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땐 타인에게 좋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비난을 받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된다. 우리가 종종 대인 관계에 실패하는 건 상대방이 온화한 상태일 때의 모습만 보아왔기 때문이며, 또 그런 모습만을 기대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극한 상황에서의 모습을 상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 혹은 그녀가 평생을 함께 해도 될만한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같이 산행을 해보라는 오랜 권유는, 비록 상대를 시험한다는 거부감 때문에 외면받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타당한 근거를 가진 조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꼭 타인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나에게서 가장 가까운 건 바로 '나'일 터이니 우선 나에게 어떤 자격 시험을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그런 시험을 검도라는 운동을 통해 종종 거치곤 한다. 가령 나보다 경험이 훨씬 적은 상대를 대할 때, 나는 평정심을 유지한 채 좋은 자세로 거의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있다. 이때만큼은 내가 그럴 듯한, 혹은 꽤 훌륭한 검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만족하기는 쉬운 일이다. 온화한 마음을 유지한 채 차분한 상태의 상대방과 유쾌하게 대화하듯 막힘이 없다.

 

그러나 요즘처럼 체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훈련을 하게 되면, 나는 그동안 내가 알던 나와는 전혀 다른 상반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왼발은 끌리고 허리는 서지 못하며 타격은 힘을 잃는다. 그렇게 진이 완전히 빠진 상태에서 대련에 들어가면,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그저 자만심이었음을 알게 된다. 모든 환경이 완벽에 가까울 때 나는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다른 상황에 처하게 되면 부정하고 싶은 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몸도 마음도 편안한 상태의 대련 연습으로는 나의 그런 면을 자각하기 어렵다. 그때그때의 대련은 즐거울지 모르나 아마 난 발전하지 못하고 머무를 것이다. 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지적 또한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공격 연습과도 같은 우리 도장의 훈련 방식이 때론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다가도, 그 방식만이 줄 수 있는 나의 발견에 만족하게 된다. 전일본검도선수권 및 세계검도선수권 대회에서 몇 차례 우승을 차지했던 타카나베 스스무는 공격 연습이 가하는 체력적 악조건 속에서도 자세를 바르게 하여 정확하게 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고 했으니, 그래야만 정신과 기술이 발전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을 그렇게 하더라도 막상 체력의 한계가 다가오는 그때가 되면 나의 의지는 또 다시 흐트러지고 만다. 로베르트 무질의 문장을 인용하자면, "현재의 단 1초의 욕구가 현존재의 모든 강력한 지속감을 이기는 기이한 순간", 즉 "암벽 등산가들이 손가락에 느끼는 고통 때문에 자진해서 손을 놓아버리는 순간, 쫒기는 자가 옆구리의 통증 때문에 멈춰 서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비록 낭떨어지에서 떨어지고 추격자에게 잡히게 되더라도 힘을 뺄 수밖에 없는 그 1초의 욕구가 날 엄습한다. 난 앞으로도 그 1초의 욕구를 매번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인간인 이상 그 1초가 찾아오는 걸 피할 수는 없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1초가 찾아오는 시기를 조금씩 뒤로 늦춰가는 일이다. 중단 자세에서 허리를 넣은 채 한 발 더. 힘이 들면 기합을 넣고 한 발 더. 오늘도 그 1초는 도장 바닥 아래 낮은 곳을 맴돌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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