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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벽에 걸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16. 9. 17.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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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V 프로그램 '진품명품' 사상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던 작품 중에 화원 김희겸이 조선시대 무신인 석천 전일상을 주제로 그린 풍속화 <석천한유도>가 있다. 1748년 6월에 그려진 이 작품은 감정가가 15억원으로 책정되어 2011년 당시 역대 최고가를 기록했으나, 2015년에 다시 최고가를 갱신한 <대동여지도 채색본>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 풍속화는 여전히 역대 2위의 기록에 올라 있다.


내가 이 유명한 회화에서 눈여겨 본 점은 누마루 기둥에 걸려 있던 한 자루의 칼이었다. 그 칼은 바닥에 놓여 있거나 어딘가에 기댄 채 서 있는 게 아니라 칼집고리와 띠돈 사이의 끈목으로 기둥에 '걸려' 있었다. 이처럼 칼이 걸려 있었다는 것은 내게 시사해주는 바가 있었다.


김희겸 <석천한유도>, 자료제공: 문화재청DB



2.

대나무를 네 쪽으로 길게 붙인 죽도는 칼의 대용이며, 따라서 검도를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연습 도구이다. 그런 죽도를 집안 벽에 걸어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게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적당한 도구 없이 콘크리트 벽을 뚫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고, 소모품에 불과한 죽도를 굳이 벽에 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어서 미적대고 있었다. 


나에겐 어떤 당위성이 필요했다. 집안 어딘가에 그냥 세워두면 될 것을 왜 이런저런 수고를 들여 벽에 걸어야 하는가? 죽도에 나름의 상징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누구에게나 인정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마치 프라모델을 집에 전시해두는 것처럼 그것은 오직 그 자신에게 가치를 지니는 일이었고, 설사 그 가치가 어떤 단체 내에서 나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더라도 그 역시 벽에 거는 수고로움에 대한 적당한 핑계는 되어주지 못했다. 죽도는 항상 휴대하며 직접 수련했던 도구이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어쨌거나 어딘가에 기댄 채 세워두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이런 고민은 공방에 날을 세우지 않은 칼, 이른바 '진가검'의 제작을 의뢰하면서 해결되었다. 죽도는 몰라도, 실지 칼과 다름 없는 진가검을 그냥 아무대나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총 다섯 자루의 칼을 걸어둘 수 있는 좌대를 구매하여 벽에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집안 벽에 설치한 벽걸이 좌대



그런데 문득 옛 시절엔 우리 조상들이 칼을 어떻게 보관했을지 궁금해졌다. 필요시 병사들에게 나눠줄 무기를 보관하는 병기고는 평범한 칼들을 모아두는 곳이므로 아마도 그것들을 한 무더기로 (현대의 죽도 꽂이처럼) 세워두었을 것이다. 내가 궁금했던 것은 선비나 무인이 자신의 집에 특별한 칼을 보관하는 방법이었다. 나무로 짠 기다란 함에 보관한 사람도 있을 테고, 가죽으로 싸매 한쪽 구석에 세워둔 사람도 있을 터였다. 혹시 요즘 사람들처럼 벽에 여러 개의 칼을 걸어둔 사람도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칼을 벽에 걸어둔 경우가 있기는 했던 것일까? 오늘날 벽에 칼을 걸어두는 것은 어쩌면 일본식 문화의 무조건적인 답습이 아닐까?



3. 

내가 <석천한유도>를 유심히 본 것은 그런 의문 때문이었다. 그림 속의 기둥에 걸려 있는 칼을 보니 소수이건 다수이건 간에 칼을 어딘가에 걸어 보관하는 경우가 있다는 게 확실해졌다. 다른 문헌에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사의 <김준열전>을 보면, 별장 김인문의 집안 '벽에 활과 칼이 걸려' 있다는 서술이 나온다. 


"유종식은 별장 김인문(金仁問)의 집을 찾아가 벽에 걸린 활과 칼을 보고는 가져다가 어루만지면서, “그대는 대장부다. 지금 이 시절에는 이 물건으로 재상이 될 수도 있는데 어찌 아녀자들처럼 하잖게 살아가는가?” 하고 속을 떠보았다. 그러나 김인문은 그 말을 이상하게 여기고 대답하지 않았다."[각주:1]


위 인용문을 보면 당대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칼을 어떻게 보관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칼을 벽에 걸어두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걸어두는 방식은 (일본과는 다르게) <석천한유도>의 그림처럼 벽에서 튀어나온 못걸이에 걸어두는 형태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시대 환도의 패용은 띠돈과 끈을 이용해 허리에 매거나 어깨에 걸고 다니는 방식이었으니, 환도를 벽에 보관할 때에도 역시 이 끈을 이용해 거는 것을 선호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환도와는 다르게 일본의 우치가타나는 끈으로 패용하도록 만든 부속이 없으므로[각주:2] 벽에 걸어 보관해야 할 경우 오늘날처럼 양쪽에서 검을 받드는 형태를 띠어야 했을 것이다.


현재 공식적으로 소재가 파악된 조선의 도검은 겨우 수백 자루에 불과할 정도로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보건데 조선의 선비들을 비롯한 많은 무인들이 칼을 가까이 했음[각주:3]은 확실하다. 그러나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의 선조들은 칼을 소모품의 성격으로 대했으며 또한 개인 병기를 각자의 집에 두지 않고 대부분 관아의 병기고에서 관리하도록 하였으니, 그들이 개인용 칼을 자택에서 어떤 방식으로 보관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려웠다. 분명한 건 칼을 다루었던 우리 선조들 중 일부는 자신의 칼을 자택의 벽에 걸어두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검을 벽에 걸어 특별히 보관하는 행위를 일본 특유의 문화로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혈통 있는 어떤 가문에서는 유산으로 내려오는 오래된 칼을 벽사, 즉 귀신을 쫓고 정신적인 수양을 하기 위한 상징으로써 신위에 모셔두기도 했으니, 모든 우리 조상들이 칼을 하찮게 본 것만은 아니다. 


이로써 나는 죽도, 그리고 제작이 끝나면 도착할 진가검을 벽에 거는 행위에 어느 정도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1. 김준 [金俊],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경인문화사)에서 인용 [본문으로]
  2. 일본도 중 '타치'는 허리띠에 매어 착용했다. 우리 선조들이 환도에 여러 부속(가락지, 칼집고리, 끈목, 띠돈)을 달아 패용했던 것처럼 중세의 막부 무사들은 타치를 사야(검집)에 달린 패용장치를 이용해 허리띠에 매어야 했다. 따라서 중세에 일본 무사 계급이 항시 칼을 허리춤에 '끼고' 다녔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국시대 이전의 타치보다는 16세기 이후의 우치가타나(카타나)가 일본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관계로, 일본도를 끈을 이용해 패용했던 방식은 대중의 인식과 거리가 있다. [본문으로]
  3. 항상 장도를 품고 다녔다는 '칼찬 선비' 남명 조식의 생애, 이인상의 회화 <검선도>에 나오는 신선과 검,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17권 중 '방친의 유사'에 나오는 서인의 일화, <속동문선>의 김일손의 일화 등을 보면 무인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선비들이 칼을 패도하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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