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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양식 (지식공작소 2001), 앙드레 지드 지음, 김붕구 옮김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1. 3.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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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여기 강원도까지 이 책을 들고 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카뮈는 자신의 어떤 글에서 이 책이 '청소년이었던 시절, 자신을 가장 가슴 떨리게 했던 책'이라고 말했었고, 난 그의 그런 평 때문에 이 책을 샀었다. 그게 2002년도였다. 하지만 난 조악한 번역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왜 이 출판사의 책을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당시에는 지상의 양식을 번역한 출판사가 이곳 한 군데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관념적인 언어로 쓰여 읽기 쉽지 않은 책인데 번역마저 말끔하지 않아 난 여러 차례 이 책을 덮어버렸었다. 그런데도 난 다시 이 책을 들고 있었다.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카뮈가 읽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꼈던 책이라면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그런 비슷한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 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시 내가 이 책을 읽을 준비가 안 되어있었다는 것을 난 이제 인정한다. 난 계속 속독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볼 시간을 갖지 못했고, 눈으로 빠르게 읽히지 않는 문장에 답답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난 그것을 전적으로 번역 때문이라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날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을 기피하고 있었다. 한번에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난 어느 순간부터 보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난 다시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라도 찾아온 것처럼 난 다시 책의 한 페이지를 꾸준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상상하기 싫어 피했던 것들을 천천히 마주하자, 엉터리라 생각했던 그 문장들이 생생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참 신기하지? 나무들은 이렇게 달고 맛있는 과일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걸까?" 장을 보러 갔다가 과일들을 보며 나에게 건넨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지상의 양식이란 바로 그런 과일들을 말하는 것이리라. 과일이 양분을 지니듯 이 책도 그런 양분을 지닐 수 있기를, 우리가 과일에서 양분을 흡수하듯 우리도 이 책에서 정신의 양분을 흡수할 수 있기를 앙드레 지드는 바랐을 것이다. 난 주머니 속에 수일 간 넣어두었던 과일 하나를 미적미적 꺼내 바라본다. 먹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버리지도 않았던 그 과일을 난 수 년 간 가지고 돌아다녔었다. 그리고 이제야, 난 그 과일을 차디찬 물 속에 넣어 씻고는 천천히 한 입 베어 먹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난 그게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다. 난 과일의 이름을 알기 전엔 그 맛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난 그 허울을 벗어버리고 싶다. 그리하여 이름과는 상관 없이 바로 그 맛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내가 혼자서 아홉 개의 교향곡을 짓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더라도 너희들은 영원히 나를 비웃을 권리가 있다."라고. // 결코 토니오 크뢰거 같은 '길 잃은 시민(예술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시민 사회의 일원(속물)이 되기 위해 자기의 선 자리와 가문과 국가의 내력을 배워야 한다는 것. (...) 예지란 이성 속에 있지 않을지 모르나, 이성 속에서가 아니라면 그 예지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를 음미해야 한다는 것.  9~10쪽


행동의 선악을 '판단'하지 말고 '행동'할 것. 선인가 악인가 개의하지 말고 사랑할 것. // 나타나엘이여, 나는 그대에게 열정을 가르쳐 주마. // 평화스러운 나날보다는, 나타나엘이여, 차라리 비장한 삶을 택하라. 나는 죽어 잠드는 휴식 이외에 다른 휴식을 바라지 않는다. (...) 내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모든 것을 이 땅 위에서 털어놓고 나서 더 바랄 것 없는 완전한 '절망' 속에서 죽기를 나는 '희망'한다. 27쪽


신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타나엘이여, 그대가 이미 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을 행복과 구별하지 말라. 그리고 그대의 온 행복을 순간 속에서 찾으라. 37쪽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사람이다. 38쪽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 나의 맨발이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먼저 감각이 앞서지 않은 지식은 일체 나에게는 소용이 없다. 41쪽


"체계를 세우는 것이 자넨 그렇게도 재미가 있는가?" 하고 그가 말했다. 내가 대답하기를 // "나에겐 윤리처럼 재미있는 것이 없어. 정신의 만족을 거기서 얻을 수 있거든. 윤리를 정신에 결부시키려고 하지 않고는 나는 아무런 기쁨도 맛볼 수가 없어." // "그러면 기쁨이 커지는가?" // "그렇지는 않지만 나의 기쁨이 정당하게 되지." 51쪽


그대는 많은 기쁨을 대가로 치러야만 사색의 권리를 조금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사색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정말 강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3쪽


나타나엘이여, 이제는 나의 책을 던져 버려라. 거기서 너 자신을 해방시켜라. 나를 떠나라. (...) 누구를 교육하는 체하는 일에 나는 지쳐 버렸다. 그대가 나를 닮기를 바란다고 내가 언제 말한 일이 있었던가?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다. (...) // 나타나엘이여, 나의 책을 던져 버려라. 거기에 만족하지 마라. 그대의 진리가 어느 다른 사람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 만약에 내가 그대의 양식을 찾아준다면, 그대는 그것을 먹기 위한 시장기를 잃고 말 것이다. (...) // 나의 책을 던져버려라. 그것은 인생에 대하여 취할 수 잇는 수천의 태도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대 자신의 태도를 찾아라. (...) 아아! 무엇과도 대치될 수 없는 존재를 너 스스로 창조하라. 191~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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