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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정창영 옮김. (물병자리 2007)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3. 6. 18.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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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얼마 떨어지지 않은 둔턱 위로 선지지라고 알려진 사람이 나타난다. 밭에 있던 사람들은 쟁기질을 멈추고는 일군의 무리를 뒤에 이끈 채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가는 그 선지자를 바라본다. 어떤 이들은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외친다. 저분이야. 바로 저분이라고. 그들은 한 손에 쥐고 있던 쟁기를 자신도 모르게 땅에 떨구고는 최면이라도 걸린 듯, 멀리 서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그쪽으로 걸어가다가 이내 뛰어가기 시작한다. 이 인간적인 예언자는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밭고랑 사이에 쟁기를 놓고 오는 이들에게 나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21쪽) 나는 그가 예언자임을 알지 못했다. 다만 책에서 목청껏 외치는 사람들의 말이 그를 예언자라고 부르기 때문에 나 또한 그를 예언자로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위해, 자신들이 지금껏 하던 노동을 잠시 멈춘 채 다가오는 그들에게, '나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 한 문장에서, 나는 그가 분명 예언자가 맞음을 알 수 있었다. 보라, 우리 소인들은 언제나 내가 무엇을 받지 못 했음을, 그에게서 무엇을 얻지 못했음을, 그의 무엇이 부족하고 그래서 무엇이 불만임을 말할 뿐이다.


"그대가 우리와 함께 지낸 세월이 / 하나의 추억으로만 남게 하지 마십시오." (23쪽)

추억은 좋은 것이지만 한편 추억만으로 남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누군가가 이제 곧 나와 추억으로만 남게 운명에 놓인다면 어찌 슬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추억으로만 남을 상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 추억을 생각하지도, 그렇게 그리워하지도 않고 있다.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인연이 얼마나 깊으면서도 약한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쓴다. 마치 그 사람을 이미 추억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한편으로, 이 예언자가 오팔리스 사람들을 떠날 것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이 책의 시작처럼, 때로는 그 이별을 받아들여야만 할 때도 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상반된 감정이고, 따라서 받아들이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떠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어떤 만남의 경우엔 이별이 필연적 요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남는 자가 떠나는 자가 되고, 떠났던 자가 남는 자가 되기도 한다. 난 여전히 이 만남과 헤어짐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나 사랑이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면, 만남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 만남의 시작부터 난 생각하고 있어야만 한다.


"사랑이 평온하고 즐겁기만을 바란다면, / 차라리 껍질로 그대들의 알몸을 가리고 / 사랑의 타작마당을 떠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 계절 없는 세상, / 웃는다 해도 실컷 웃을 수 없고, / 운도 해도 모든 눈물을 시원하게 다 쏟아내지 못하는 그런 곳으로." (35쪽)

예언자는 사랑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왕관을 씌워주기도 하지만 고통의 가시관을 씌우기도 하는 것, 가지를 자라게도 하지만 때론 가지를 쳐내버리기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다른 누가 사랑을 그렇게 표현하였을까? 나는 언제나 사랑이란 좋은 것이며, 만일 그것이 좋지 않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배웠다. 만일 그것이 인간의 조건 중의 하나인 불완전함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신의 사랑, 아니 적어도 성인들이 겪는 사랑이란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난 여전히 사랑이 슬픔 또한 주는 것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사랑이 주는 양면을 인정하는 순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그 불만스러움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이 기쁨만이 아니라 아픔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는 순간, 사랑의 힘이 더욱 위대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감정이 일순간의 것이었임을 고백해야 한다.


이번에 다시 이 책을 읽었을 때, 처음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먹고 마심에 대하여'(73쪽)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언자는 우리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희생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대들은 먹기 위해서 죽여야만 하고, /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 어린 새끼를 어미젖으로부터 떼어내야만 하지요." (73쪽)

이것은 우리가 겪는 삶의 큰 괴리 중 하나인데 이것에 대해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모든 행위가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 그대들의 식탁을 제단으로 삼고, / 그 위에서 숲과 들판의 순수하고 순결한 생명들이 / 많은 이들의 내면에 아직 남아있는 / 더 순수하고 순결한 것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도록 하십시오." (73~75쪽)

칼릴 지브란은 먹기 위해 죽여야만 하는 것을 어쩔 수 없는 생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따라서 우리 역시 언제라도 마찬가지의 입장에 처할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렇게 누군가에게 먹히는 일은 다른 숭고한 것을 위한 전단계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어려운 말이다. 자신의 희생양에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 제물이 될 때도 기꺼이 자신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과연 그것이 평범한 인간에게 가능한 일일까?


요즘 일련의 사건들을 가장 떠올리게 해주는 것은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라는 부분이다.

"그대들이 기쁠 때 가슴 속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 그러면 그대들에게 슬픔을 주던 바로 그것이 / 지금 그대들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그대들이 슬플 때 또한 가슴 속을 깊이 들여다보십시오. / 그러면 그대들의 기쁨이었던 바로 그것 때문에 / 지금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95쪽)

참으로 진실이 아닌가? 이것은 사랑이 항상 좋을 수만은 없다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그러나 기쁨을 주던 것이 슬픔을 줄 때 그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로 다가오곤 한다. 지금 나에게 기쁨을 주는 그것으로 인해 언젠가 슬퍼질 것을 미리 안다해도, 막상 닥친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는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난 한때 외치지 않았나. 나에게 언젠가 슬픔을 줄 것이라면, 지금 나에게 주고 있는 이 기쁨 또한 가져가 버리라고. 그리고 날 평온하고 고요한 상태로 내버려두라고 말이다.

난 지금도 그 말이 나에게 유효한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슬픔 때문에 기쁨조차 버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세상이 무서워 입을 꿰매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다리는 의자에 묶은 채 방 안에서 연명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법에 대하여 또한 생각할 거리를 주는 부분이다(난 이 "법에 대하여"라는 부분 모두를 기억하고 싶은 심정이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에게 판단의 잣대를 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의 멍에는 사랑하면서 숲속의 사슴과 노루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황소를 무어라고 해야하는가? 결혼잔치에서 질리도록 먹고 와서는 모든 잔치는 불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무어라고 해야하는가?

그리고 중요한 부분이 그다음에 이어진다. "그대들이 만약 / 그대들의 옷을 찢어 버리되 / 다른 사람의 길에 버려서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 그 누가 그대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겠습니까? // 오팔리스 사람들이여, / 그대들이 북소리를 잠재울 수 있고 / 수금의 줄을 풀어놓을 수는 있겠지요. / 하지만 그 누가 저 종달새에게 / 노래 부르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겠습니까? (149쪽)

난 칼릴 지브란이 자신의 말을 지켰는지는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이 책의 예언자와 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실천의 여부를 떠나서, 먼저 그런 생각을 하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며, 그런 것을 문장으로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난 그의 큰 그릇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존재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의 글에서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끝없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그는 어쩌면 알코올 중독자로, 명예와 성공에 집착했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가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때, 칼릴 지브란 역시 우리 인간 중 한 명으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예언자에서 했던 이 말을 상기한다.

"그대들은 들었을 것입니다. / 그대들의 가장 연약한 고리를 보고 / 그대들을 가느다란 목걸이처럼 약하다고 하는 것을. / 그러나 이것은 반쪽 진리입니다. /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장 강한 고리처럼 / 강한 쇠사슬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77쪽)

그는 자신이 지닌 강한 쇠사슬이 무엇인지를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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