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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긴 편지. 마리아마 바 지음, 백선희 옮김 (열린책들 2011)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3. 7. 23. 0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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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느낌이 잘 나지 않는다. 수필의 느낌. 서간체를 이용해서 더욱 그런 기분이 든다. 빠른 전개, 흥미 유발, 독특한 구성---독자를 빠르게 사로잡기 위한 그런 방법들은 쓰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통적인 소설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형식면에서 (단순히 편지의 형태가 같았기 때문에) 문득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생각났다. 그러나 편지에 날짜가 적혀있지 않고, 이 단 한 통의 편지가 무려 150쪽을 넘어가는 데다가(그래서 제목이 이토록 긴 편지인 것 같다), 그리고 소설 내용상 이 편지를 며칠에 걸쳐 작성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독자(내)가 편지를 읽고 있다는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소설적 재미를 위해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는, 아프리카(세네갈)의 여성 작가가 쓴 아프리카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읽었다고 봐야겠다.

이 책에 묘사되는 가족간의 갈등은, 일부다처제에서 오는 문제점을 제외하면 우리 문제와도 상당히 비슷해보인다. 주변에 부를 과시하려고 하거나 결혼 또는 장례에서 형식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모습, 가족 모임때마다 몇몇 사람에게만 편중되는 일거리, 그 사람이나 가족의 부를 보고 결혼을 결정지으려는 사람들...... 다만 혈통과 가문을 중요시하고 있는 이 소설 속 인물들의 태도가 오늘날에는 거의 돈으로 옮겨갔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소설 속 주인공(라마툴라이)의 친구(아이사투)는 그런 세태에 순응하지 않고, 그 전까지 운명이라고 불리던 전통과 규범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한다. 1979년의 세네갈에서 그런 선택이 얼마나 사회규범을 벗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의식이 많이 개선되었다고 평하는 현대에 와서도 남의 이목에 간섭받지 않는 선택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두 번째 부인을 들이는 남편에게 이혼을 통보한 아이사투의 선택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회상은 아니었을 거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정작 주인공은 이혼이라는 선택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이 책은 여성주의를 들고 싸우는 페미니스트 여전사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느릿하고 조용한 변화를 추구하는 구도자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라 하겠다.

책 80쪽을 보면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게다가 시부모는---늘 부모가 문제야---자클린을 못마땅하게 여겼어." 이 소설에서 부모는 자녀가 새로운 사고체계, 새로운 규범체계에 들어서는 걸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존재로 나온다. 이 역시 동양의 뭇 소설과 현실에서 마주칠 수 있는 현상인데,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이---동서양, 아프리카를 막론하고---자신의 경험이 만들어 낸 세계의 틀 속에서 가치판단을 한다는 걸 보여준다. 열린 사고에 대한 끊임없는 훈련이 없다면 내부 세계의 구성이 언젠가는 끝나게 마련이고, 그 이후의 시점에서는 새로운 규범, 가치체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게 되는 것이다.

인종과 지역을 넘어서, 우리 모두는 삶에서 끊임없는 대결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 자신과 대결하고, 부모와 대결하고, 주위 사람들과 대결한다. 그것에 순응할지, 대항할지, 그것도 아니면 동화되는 듯 하면서 남모르게 구원의 굴을 파들어갈지... 그에 따라 삶은 천자만별로 변해버리게 된다. 어떤 걸 추구해야 할지는 적당히, 심지어 쉽게 보이는 듯 하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만의 착각인지 아닌지를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몇 십 년 전에 쓰인, 전에 거의 접해본 적도 없는 아프리카의 소설이지만,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는 현대의 우리나에도 적절히 통용된다. "그녀는 (...) 자신이 결혼을 통해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 희생양인 그녀는 스스로 압제자처럼 굴었어. 자기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에 갇혀서 자신의 감옥을 금빛으로 치장하고 싶었던 거지." (92쪽) 주인공은 그 금빛의 감옥에서 나온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이 책 마지막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이렇게 긴 편지를 또 쓰게 될 날이 올지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금빛의 감옥을 나오면 은빛의, 은빛을 나오면 구리빛의 감옥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기에...... 긴 편지는 또다시 쓰여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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