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IS REVIEW의 주제 사라마구와의 인터뷰를 읽고.
주제 사라마구는 지적인 느낌을 주는 작가다. 인터뷰 내용도 그의 그런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당신의 작업은 어떻습니까? 글은 매일 쓰나요?"라는 평범한 질문에 "네, 매일 쓰고 있습니다. 하루에 2장씩은 쓰려고 노력하고 있죠."라고 대답을 끝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인다: 왜 하루에 2장을 쓸 수밖에 없는지, 하루에 2장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양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글쓰기에 있어서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지를(그는 자신이 다른 직장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번 질문은 (축약을 하자면) "한번 쓴 내용이 나중에 바뀌기도 하나요?"였다. 어느 정도 당연한 답변이 예상되는 질문이기도 했다. 한번 쓴 글을 사소하게라도 고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난 Interviewer가 다소 식상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대답들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계속 이어져 내러티브에 대한 그의 생각("내러티브는 특정한 순간에 나타나는 요구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데, 이는 이야기 속의 어떤 것도 미리 결정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과 책의 존재라는 다소 철학적인 대답으로까지 이어진다. 요약하면, 책(내용, 구조)을 미리 결정짓는 행위는 이야기의 속성에 대치되는 행동이라는 것이다("A book comes into existence. If I were to force a book to exist before it has come into being, then I would be doing something that is in opposition to the very nature of the development of the story that is being told.").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그와 관련된 것들이 미묘하게 변할 수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는 그것을 좀 더 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내 눈길을 끌었다. "등장인물의 운명은 작가의 손, 그러니까 제 손에 좌지우지되는 함정에 빠져 있지만 그는 자신이 그런 함정에 빠진 줄 모르고 있죠. (...) 제가 등장인물을 소개할 때 그 인물은 완성된 형태로 소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 등장인물을 그 자신에 대립하는 형태로 발전시켜 나갈 수 없습니다. 전 그를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려고 할 겁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죄를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전 그가 죄를 저지르게 할 수 없는 거죠. 적절한 동기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면 독자도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뒤이어 "리스본 포위의 역사"(혹은 "리스본 쟁탈전"로 번역되는)에 대한 이야기와 현재(인터뷰 당시의 현재는 1998년) 포르투갈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리스본 포위의 역사"는 책 교정자가 의도적으로 글자 하나를 바꾼('십자군의 도움을 받았다'를 '받지 않았다'로) 뒤에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소설인데, 이 단락에서 사라마구가 하고자 한 말의 골자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여겨지곤 하지만 역사 또한 결국 하나의 픽션이라는 것이다.
그 뒤에 나오는 것은 포르투갈의 EU 가입과 관련한 정치 문제였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국가 중 하나인 포르투갈은, 이 나라가 한때 많은 식민지를 거느렸으며 지리학상 서유럽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부국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은 유럽 최빈국 중 하나라는(2011년에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어려웠는데, 2014년 현재 상황이 매우 호전되고 있다는 뉴스가 들린다) 불명예를 안고 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포르투갈의 EU 가입은 포르투갈이나 당시 EU 회원국 사이에서나 중요한 문제였고, 사라마구와의 인터뷰 당시까지도 EU와의 관계는 중요한 의제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단락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와 주제 사라마구의 눈에 띄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직업은 세상을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만들어내는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고, 되도록 판단을 유보한다.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고 소설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나기 때문에 Interviewer는 EU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나의 관심사를 어느 정도 벗어나는 부분이었기에 코멘트를 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물론 포르투갈에 닥친 정세를 잘 모르더라도 인터뷰에서 그가 하고자 했던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으며 그렇기에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성(reason)이라는 것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는 것이다("All this leads me to question the use of reason in this world."). 그리고 그런 이성에 대한 의심이 바로 "눈먼자들의 도시"를 집필하게 된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난 "눈먼자들의 도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소설에 묘사된 폭력이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그것이 대중의 인기를 위한 하나의 세속적 방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인터뷰에서 사라마구는 "당신이 언급한 소설 속의 잔인성은 단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새삼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폭력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심지어 내가 가하고 있는 폭력의 잔인성에 대해서조차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글의 마지막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다양한 것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의 자신을 강조하고 있다. 과학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며 스스로를 다른 것과 구분지었던 이성이 윤리적인 면에서는 너무나도 취약함을 이야기한 뒤, 어쩌면 인간이란 이 행성에 사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른다는 극단적인 표현도 남긴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증명하려는 듯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을 비관주의자라고 말한다. "최근에 초신성이 폭발했는데, 그 초신성까지 가는데 16만 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안심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멀리까지 갈 수 있을리가 없을 테고, 그럼 여전히 우주는 (인간으로부터) 안전한 셈이니까요."
그런 그에 비교한다면 난 낙천주의자임에 분명하다. 먼 과거와 비교하면 과학뿐만이 아니라 윤리 역시 발전했왔음이 분명하다고 난 믿기 때문이다. 물론 때론 윤리와 도덕이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매우 많이, 심지어 인간성의 선함을 의심하게 될 정도로... 그러나 그런 추락조차도 아주 멀리에서 바라보면 저 위, 더 나은 곳으로 올라가는 하나의 선상에 위치해 있을 거라고,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장 감미롭고 인상적인 문구는 이것이었다: "a character in a novel is one more person. (...) We think of them as real people. That is the dream, I suppose, of all novelists---that one of their characters will become "some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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