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IS REVIEW의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인터뷰를 읽고.
신변잡기에 대한 질문, 대답 들일까봐 읽기 전에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질문자는 풋내기 리포터가 아니라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인터뷰 제목에 "The Art of Fiction"이란 부제가 달려있었는데, 그게 그저 장식용은 아니었던 셈이다. John Wray라는 Interviewer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답에 대해 '그렇군요'가 아닌 '하지만'을 외치며 하루키에게서 더 자세한 대답을 일궈내고 있었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의 두 가지 원형(주인공 주변에 첫 번째로 등장하지만 곧 사라진 뒤 주인공의 기억에 또렷이 흔적을 남기는 여자, 그에 비해 나중에 등장하고 매우 활발하며 거침없고 솔직한 여자)에 대해 묻기도 하고, 무라키미 하루키의 두 가지 글쓰기 스타일, 즉 환상적이거나 또는 매우 현실적인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질문하기도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역자는 3명이 있는데, 그들이 서로 글을 가져가기 위해 싸우지는 않느냐는 솔직한 질문들도 던진다.
그런 좋은 내용들도 있었지만, 인터뷰라는 다소 정형화된 패턴과 그런 패턴이 띠곤 하는 대화 깊이의 한계 때문에---그리고 본래 작가 자체(특정한 몇몇을 제외한다면)의 일상이나 그들의 글쓰기 스타일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내 성격 때문에---인터뷰 내용이 전반적으로 신선하다거나 혹은 다른 곳에선 알기 어려웠던 궁금함을 해소할 수 있었다거나 하는 감상을 받지는 못했다. 아, 질문이 여기서 끝인가? 너무 막연하게 마무리되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은 형식적이지 않은가? 하는 아쉬움... 다음에 또다시 기회가 된다면 더 솔직한 인터뷰를 위해서 술이라도 한 잔 걸치며 진행해보는 게 어떨까 한다. 물론 그런 식의 인터뷰를 작가가 승낙할지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하루키라면 흔쾌히 '오케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좋아하는 재즈바에서라면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지도.
그래도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이 있었다. 그가 소설을 쓸 때 가족/친족 관계에서 자유로운 주인공을 항상 생각한다고 말한 부분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전통적인 일본 소설과 마찬가지로 한국 소설도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한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특히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TV 연속극은 가족 관계에 무자비할 정도로 예속되어 있다), 나 또한 하루키와 마찬가지의 이유(가족 이야기에 편중된 문화)로 국내 '장편' 소설에 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에 관심이 갔다. 생각해보니 오르한 파묵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그런데 하루키와 나의 생각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나의 경우엔 그런 소재 자체보다는 가족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은 가족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난 그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또 그는 자신이 이론이나 어휘에 신경쓰기보다는 내러티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What is important is whether the narrative is good or not.)고 말했는데 그의 이런 관점은 나하고도 상당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들에 대한 나의 호감은 이런 유사성에서 비롯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인 닉 캐러웨이를 떠올리게 될 때가 많았는데, 이 인터뷰에서 하루키는 자신의 주인공이 위대한 개츠비의 닉 캐러웨이를 닮아있다고 직접 밝히고 있었다(If I may say so, he resembles Nick Carrasay in The Great Gatsby). 글쎄, 뭐랄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답을 맞춘 기분이어서 기분이 꽤 좋았다. 내가 이 작가를 완전히 아니겠지만---누가 완전히 알 수 있을까?---어느 정도는 알고 있구나, 하는 그럼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인터뷰가 꽤 오래전에 이루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날짜를 다시 한번 찾아보니 "2004"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무려 10년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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