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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란 무엇인가. 유종호 지음 (민음사, 2003)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4. 4. 3. 01:39

본문

1.
나는 문학 이론을 모르고 자랐다. 물론 학창 시절 듣고 보고 배웠던 것이 있으니 아주 완벽히 모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학 수준의 이론을 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것은 학창 시절, 문학에 대한 획일화된 이론에 실망하고는 그 이후 쭉 이론 자체를 경원시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학을 누구로부터ㅡ특히 이론을 통해 정석처럼 배울 수는 없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나의 글에는 정규과정의 교사가 필요치 않았다. 찾으려고만 하면 스승은 어디에나 있었다. 단 몇 장의 이야기 속에서도 난 그걸 찾을 수 있었다. 그래서 난 학창 시절 문과를 지망하지 않았다. 난 나 스스로 배우기 힘든 걸 선택하고자 했다.

 

하지만 나이가 점점 들고 보니 그 이론이라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론이 나고 그를 바탕으로 텍스트가 만들어진다고 믿지 않고 (그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난 이론이라는 것에 큰 의의를 두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한 채 공고히 학문의 탑을 쌓아온 그 이론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점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문장에 들어갈 적절한 단어의 선택, 그 선택에 따른 의미의 변화, 문장의 위치가 글 전체 분위기에 미치는 영향ㅡ아마도 이런 것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러니까 책을 읽으면서 저절로 익히게 되는 감성을 마치 선점이라도 하려는 듯 '이것은 이것이다'라며 법칙으로 만들기 바쁜 것들의 집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난 그것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시작된 것은 어떤 차이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니까 동서양 작가들과 한국의 젊은 소설가들이 쓴 책들을 읽던 도중, 문득 그런 책들과 우리나라의 또 다른 작가군의 책들, 예를 들어 박경리의 "토지"나 최명희의 "혼불"과 같은 책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특유의 (이를테면 '한') 정서 때문인지 아니면 토속을 많이 입힌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여타 다른 이유에서인지 생각해보았다. 그러다가 어쩌면 그 해답을 문학 이론이라는 것을 통해서 좀 더 상세히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머릿속에서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지만 그걸 글자로 풀어쓴 것을 보면 (만약 그러한 것이 있다면) 좀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

 

그때 기억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이 책은 몇 년 전 한 사람이 추천하여 구매(구매한 건지, 그 사람에게 선물 받은 것인지 명확히 기억나지 않는다)하게 된 것인데, 당시 자기 대학교에서 수업 교재로 쓰던 책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문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었다.

 

그런 기억 덕택에ㅡ비록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ㅡ이 책을 들춰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내가 몇십 년 동안 품고 있었던 '문학 이론'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선입견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백과사전식의 정의를 통한 이론 배열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설명에 따라 문학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천천히 설명하고 있었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개념 나열식의 책이 아니었다. 이런 구성은 저자의 명확한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서문에 이렇게 썼다: "(...) 이론을 위한 이론 놀이로 그쳐 실제 작품 향수와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갈 때도 많다." (서문)


그러나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은 이 책으로 문학 이론서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 아니라, '이런 올바른' 주장을 하는 이론서도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변하였을 뿐이라는 점이다. 기존에 배웠던 이론이라는 것은 분명 지은이의 살아온 배경과 사상으로부터 텍스트를 분석하고 요약하는 데 치중하고 있었는데, 문학을 그런 식으로 분해하려는 시도는 문학 이론을 일차적이고 경직된 것으로 느껴지게 했다. 난 이 책 또한 그런 식의 이론들에 동조하고 비슷한 방식의 분석을 시도하는 이론서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시에서 협의의 가르침이나 교훈을 건져내려는 성향은 이내 어떤 사상이나 이념을 찾아내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몇몇 생각을 추상해냄으로써 그 작품을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 그러나 시를 처음부터 또 일차적으로 사상의 표현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시 이해의 바른길이 될 수 없다. 철학적이며 추상적인 사상의 소재를 찾아서 가령 이백이나 두보에 접근해 간다면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경험할 것이다." (39쪽)


이것뿐인가. 다음을 보면 잘못된 문학 교육 행태도 날카롭게 꼬집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문학 이해를 위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각급 학교 수준에서의 문학교육은 적절한 문학 향수나 문학 이해에 대한 장애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국민학교나 중학교 수준에서의 적절치 못한 문학교육은 오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 같다. 이때 길들여진 문학 이해나 작품해석의 버릇이 오래도록 그 흔적을 남기는 것으로 생각된다." (121쪽) 내가 학창 시절 문학교육에서 느꼈던 그 경직된 방식을 그대로 지적하는 글이었다. 내가 문학은 좋아하되 문학 이론은 경시하게 되었던 그 원인을 저자는 명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글쓴이의 이런 모습은 내가 그동안 이론가들에게 가지고 있던 일방적인 선입견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다. 하나 더 예를 들자면, "시를 산문으로 검토하고 있는 비평 담론은 시인의 철학적 사상적 신념의 일관성이나 명석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또 문학의 흐름을 윤곽적 도식적으로 제시하려는 문학사가들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특히 현저하다. 또 시인의 작품 속에서 철학자 발언의 근사치를 발견하여 영향관계를 설정하려는 경향도 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경향이 농후하고 또 <철학적>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시인의 경우에도 <시가 철학적일수록 좋은 시인가?>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라고 하는 부분 역시 그렇다. 저자의 발언은 평소 내 생각과 상통하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문학 이론에 대한 오해를 풀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동일한 선상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저자의 말을 아래쪽에 몇 개 더 인용하였다(여러 차례 인용할 만큼, 나에게는 글쓴이의 이런 주장이 무척 생경하게 다가왔다. 난 이론가가 그런 주장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나 여기 담긴 생각이란 것은 철학이나 이념이란 이름으로 처리할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토막생각이란 이름에 어울리며 도 일정한 감정에 휩싸여 있는 생각의 조각이다. (...) 그러나 미리 어떤 철학 체계가 구성되어 있고 그 순차적인 표현이 낱낱의 시편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41쪽)


"사상이나 철학을 포용하고 있는 시에 대해서 우리가 인색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짤막한 근대의 서정시에서 사상과 철학을 찾아내어 그 정도에 따라 시를 판단하려는 태도는 시 이해를 위한 정도가 되지 못할 것이다." (45쪽)

"사상도 철학도 어디까지나 시의 소재 내지는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만큼 시 속에 통합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산문적 진술로의 환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는 없다. 그러한 안이한 습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시 이해의 정도일 것이다." (46쪽)

 

 


2.
문학 이론에 대한 이런 소회 이외에도 이 책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다.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있는 아름다운 시와 산문 들은 단순한 하나의 예시가 아니라 선물처럼 느껴졌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시가, 멋진 산문이 있었던가! 하는 놀라운 선물. 어쭙잖게 몇 번의 시 번역을 했던 기억을 되살려준 '시와 번역'도 좋았고, 글쓰기에 있어서 스승의 역할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던 부분도 좋았다. 구구절절 이야기하기보다는 다시 읽어 볼 만한 문구와 소제목별 요약문을 아래에 남겨 놓는 게 좋을 듯싶다.  

 

 


3. 소제목별 요약
'문학 텍스트의 확정'에서는 문학에서 쓰이는 단어가 비록 비슷한 뜻일지라도 정확히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의미와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런 내적인 때문에 작가 스스로 초기의 완성본을 고치는 경우가 있고, 또 외부의 압력 때문에(교육, 정치 등) 본래의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윤석중 동요선집 "날아라 새들아"에서 '담배'가 '달래'로)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개작이 이어지는 것을 좋게만 보아야 하는가, 그리고 원본과 개작본 중 어떤 걸 정본으로 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있다. 저자 유종호는 이에 대해 단 한 가지의 정답만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시와 사상'에서는 동시와 일반 시의 비교를 통해 문학이 주는 효과에 관해 이야기한다. 즉 '즐거움을 주는 글이 문학이다'부터 시작하여 아름다움, 삶에 대한 예고, 좁은 의미의 도덕적인 교훈, 공감의 공유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경험의 교환, 삶의 모질음과 가파름 또는 목숨의 덧없음과 같은 익히 아는 감개 등을 문학의 효과라 이야기한다. 이 장에서 이야기하는 또 다른 중요한 점은 시의 해석을 사상과 철학과 같은 큰 범주에서만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와 진실'에서는 문학에서 말하는 허구와 실제 세상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에 관해 이야기한다. 시적 허용과 같은 예를 통해서, 저자는 문학의 허구는 큰 문제가 아니며 오히려 시인 작가들이 오랫동안 역사가들과 과학자들에게 가지고 있던 어떤 자격지심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시의 언어'에서는 기본 어휘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한다. 교양체험에서 얻은 후기 습득언어 또한 중요하기는 하나, "삶의 외경과 신비, 그 공포와 불가사의, 그 뜨거움과 한기를 하나의 경험의 덩어리로 가지고 있는 기층언어와 유아기 습득의 기초어휘의 풍요한 함축"(75쪽)이야말로 우리에게 진솔한 호소력을 전해줌을 김광섭 시인의 시를 통해 설명한다. 여기에서 인용하고 있는 김광섭의 몇몇 시들은 평생 마음에 담아 둘만 한 작품들이다.


'시와 산문'에서는 시와 산문의 정의와 그 구분의 어려움을 김기림의 시를 통해 이야기한다. 외형적인 모습만을 보고는 시와 산문을 명확히 구분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것을 밝히고, 사르트르의 경우엔 시와 산문을 어떻게 구분하는지 인용한다. 그의 인용에 따르면, "시인은 말을 기호로서가 아니라 사물로서 간주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87쪽)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또 여기에 문학에 대한 중요한 인용을 하는데, "문학의 언어는 일상언어에 가해진 조직적인 폭력이라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관점"과 "문학성이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 있는 담론이 곧 문학작품이라고 하는 로만 야콥슨의 시 언어 이론"(모두 88쪽)이 그것이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시와 산문, 그리고 문학의 언어라는 것이 일상의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지, 즉 이 책의 제목인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단초를 내게 제공해 주었다.


또 내가 관심 있게 본 것은 산문처럼 보이는 글에서 시의 요소를 찾아 읽어내는 부분이었다. 예로 든 시는 백석의 시였는데, 저자는 "그러니까 투명하고 막힘 없고, 밀도 없는 일상언어와 달리 작품 속의 방언이나 사용 빈도가 낮은 생소한 단어가 은연중에 시어 구실을 하는 셈이다."(92쪽)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언제나 사용 빈도가 낮은 생소한 단어를 멀리하고 사람들이 자주  쓰는 일상언어로 글을 쓰는 것이 훌륭한 글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나온 이론을 사용하자면 기층언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부분에서는 사용 빈도가 낮은 생소한 단어가 시어 구실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 글이 어떤 글이냐 하는 것을 정의하는 것은 그 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정취가 어떠한 것인가, 즉 포에지가 어떠한가를 잘 읽어내야 하는 셈이다. 이것은 글의 시적인 요소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는 내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문제이다.


'시와 번역'에서는 번역의 어려움과 그 필요성에 대해 말한다. 이름을 남긴 번역자가 없다는 사실에 애석해하며 앞으로라도 번역작품을 통해 모국어와 문학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의적 해석의 허실'에서는 기초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문학 교육이 어떤 문제점을 가졌는지 이야기한다. 문학작품을 그 자체의 끌림과 아름다움으로 먼저 다가가지 않고, 당시 사회 환경의 고발이나 일제 치하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사건에 대한 반발심에 비롯된 것이라고 (심지어 동요에 대해서도) 가르치는 것은 그릇된 접근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그런 과정에서 시를 사회적 상황과 맞추려다 보니 과도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도 문제라고 말한다.

 

 


4. 인용문

"그것은 가파로울 수도 있는 삶에 대한 은밀한 예고이다." (33쪽)


"동시나 동화는 극히 제한된 세계이해나 인간파악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 어린이를 위한 또 때로는 어린이에 의한 문학이다. 거기에는 문명의 복합성이나 인간심리의 복잡성에 대한 의식이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 일의 따분함보다는 놀이의 즐거움이 눈짓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시의 세계와 시의 세계를 단순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리성이나 유용성에서 떨어져 있는 어린이의 눈을 시인의 눈과 동일시하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이해가 아니더라도 동시와 시, 민요와 시 사이의 연속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즐거움을 주는 글>이라는 정의가 동시에 적용되는 그만큼 그것은 시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35~36쪽)


"허술하고 막돼먹은 번역소설 독서는 문학의 핵심부에 있는 문체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길러 주지 못하고 소설을 단순한 얘기와 줄거리의 차원에서 즐기게 해준다. 즉 모든 진지한 소설을 단순한 대중  소설로 격하시켜 향수하게 만다. 또 서투르게 번역된 시는 시의 고유한 즐거움을 독자에게 맛보여주지 못하고 고작 단편적인 격언이나 경구 혹은 사실 진술로 비치게 한다." (96쪽)


"문화적 원천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중요시했던 우리의 지적 전통에서는 기억할만한 번역자를 내지 않았고 또 그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않았다. (...) 가령 괴테나 휠덜린과 같은 최상급의 시인이 탐욕스러운 번역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번역이 독일어의 <내밀한 운명>이라는 것을 독일의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터놓고 얘기한다." (117쪽)


"우리말로 잘 읽히는 번역시가 우선 좋은 번역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얘기는 끝나지 않는다. (...) 우리말로 잘 읽히면서 동시에 번역시만이 줄 수 있는 강렬한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말로 잘 동화된 번역시는 동시에 범상한 시로 떨어질 수 있다. 우리말로 잘 동화된 중국시 번역에서 촉발되는 미흡감은 바로 그런 것이다." (117쪽)


"(...) 우리 말 속에서 편안히 앉아 있다. 일단은 좋은 번역이다. (...) 그러나 (...) 문학작품에 고유한 <낯설게 하기>의 충격이 없어 범상하게 들린다. (...) 따라서 우리말로의 토착적인 변용과 함께 우리말에 충격을 주어 그 역동성과 신축성을 넓혀주는 것이야말로 번역시의 이상 상태인지도 모른다. 번역을 통해서 획기적인 근대어 발전을 성취했다는 독일어를 모국어로 한 벤야민이 인용하고 있는 생각은 음미에 값한다고 생각된다. <번역가는 (...) 언어 그 자체의 원초적 요소 즉 말과 상징 및 토운이 하나로 합쳐지는 점에까지 소급하면 안된다. 그는 외국어의 수단을 통해 그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118쪽)


"시인은 (...) 세목에서 시작했고 독자는 우선 이 대목에 끌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제대로 작품을 음미하고 이해할 수 있다. (...) 그런 과정 없이 대뜸 일제하의 농촌 고발이라는 설명을 앞세우는 것은 순서가 바뀐 향수 과정이다." (124쪽)


"작품 발생의 구체적 맥락이나 부대상황의 정보 없이도 독자를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작품이야말로 그릇이 큰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130쪽)


"8.15 이후 자기 검열을 통한 민족감정의 억압이 해제되고 외부상황도 민족감정에 한해서 관용스러워지자 일제하의 문학을 모두 독립과 해방을 위한 은유, 억밥받는 상황에 대한 우의로 읽는 버릇이 부지중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137쪽)


"항시 나라사랑과 이웃사랑, 우국과 우민을 외쳐 대는 직업적 애국자나 백성 사랑주의자를 경계해야 하는 것은 정치 뿐 아니라 종교나 문화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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