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김연수의 단편소설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단편은 거의 다 찾아서 읽었고, 그 뒤 찬사에 가까운 후기도 남겼다. 그런데 이 장편 소설에 대한 느낌은 다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설에 관한 주관이 이 장편 소설과는 많이 어긋나 있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아무래도 독특한 설정이다. 김연수는 각 인물의 배경 설정에 상당한 공을 들이는 작가다. 그런 특징은 장단편을 가리지 않는다. 소설 등장인물들의 사연은 겉으로 볼 때는 평범한 것 같지만(어렸을 때 외국에 입양된 소녀가 엄마를 찾는 이야기) 구체적인 말을 들어보면 예상치 못한 사정이 있다. 그녀의 양아버지, 그리고 그녀가 엄마를 찾을 때 도움을 받는 서 교수는 신기한 인연으로 얽혀져 있다. 주인공은 사진 하나에서 특별한 단서를 발견한다. 매생이국이나 동백꽃에 관한 일화를 섞어넣는 솜씨, 엄마를 찾는 과정 사이사이에 소수자(여성, 왼손잡이) 문제, 경제 발전 과정에서 희생된 노동자 문제, 동생들의 희생으로 성공한 장남 문제 등을 하나하나 끼워넣는 솜씨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어떤 독자는 칭찬할 만한 부분이라고 하겠지만---나에겐 과하게 느껴졌다. 복잡한 사연, 독특한 배경은 경직된 치밀함처럼 보였다.
이 소설이 훌륭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딱 봐도 굉장한 공이 들어간 좋은 소설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굉장한 공이 오히려 이 소설의 가치를 상대적으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단편은 분량이 짧기 때문에 짜임새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장편에서도 그런 과정이 길게 이어지자 짜임새보다는 뻣뻣함이 부각되었다. 이해를 위해 나와 견해가 일치하는 손택의 문장을 가져오고자 한다. "억지로 짜 맞추느라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보바리 부인>이나 <율리시스>와 비교해보자면,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나 카프카의 <변신>은 문학적 야심 면에서도 뒤지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고 조화롭다. 앞의 두 소설도 분명 위대한 작품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예술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지, 억지로 짜맞춰지는 것이 아니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63~64쪽)
소설에서 작가 자신의 실체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소설의 몰입을 방해했다. 주인공의 남자 친구는 시를, 여자 친구는 소설을 쓴다는 설정에서 시로 등단하고 그 후 소설을 썼던 김연수 자신이 생각났다. 남자 친구가 주인공에게 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면서 하는 말들은 김연수가 인터뷰나 다른 책을 통해 실제로 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이 작가를 조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었고, 필요 이상으로 그를 의식한 탓이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잘 아는 편한 길을 선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도 더 날 각다분하게 한 것은 곳곳에서 등장하는, 소설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시적 감수성이었다. 슬픈 감수성이 이 소설 전체를 감싸도록 하기 위해 작가는 많은 공을 들였다. 그래서 꿈, 인생의 의미, 엄마, 검은 바다, 자살, 시, 바다와 나비, 안개, 여섯 개의 상자로 남은 유년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여 우리의 감정이 다른 곳으로 새는 것을 막고 있었다. 단편이라면 아마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길다면 긴 이 소설 내내 그 감정을 붙잡아야 한다는 건 내게 고역이었다. 작가는 "넌 오랫동안 울었다"가 아니라 "네 울음은 생각보다 길었다."(145쪽)라고 썼다. 어떤 사람들은 이 표현이 멋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난 조금 지쳐서, 이제 저 구부러진 철사를 손으로 반듯하게 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 소설은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오랫동안 바닷속에서 헤메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느낌을 주었다. 김연수는 그의 갖은 능력을 동원하여 내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걸 막았다. 난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정도면 이제 충분하다고.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평은 인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지쳐버린 바로 그 수법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이 책이 훌륭한 소설로 인정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평할 거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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