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당신의 2,000개의 서평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3. 23. 16:50

본문

1.

사람들은 TV 드라마를 보면서 웃고 즐거워한다. 어쩌면 TV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행복이라는 걸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행복해야 된다'라는 관점에서 보면, TV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좋은 매체로 보인다. 대중 음악, 난타 공연도 우리에게 즉각적 흥겨움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행복을 위한, 마음의 안식을 위한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뭉크의 그림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머스 커닝엄의 무용은 우리에게 어떤 즉각적 쾌락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감정을 주지 못하는 데도...... '예술'이라 불린다.

 

예술이 담고 있는 이런 문제의식이 '모든 것에 대한 포용', '주어진 것에의 만족'과 같은 감정에서 탄생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세상만사를 오로지 긍정적, 낙천적 시각으로 본다면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도 그저 '만족하라, 더 나쁜 환경에 처한 사람도 있으니 행복하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경외심에 차서, 숭고함에 무릎을 꿇은 채 그 벅찬 감동과 사랑을 전하려는 예술도 있을 것이다. 르네상스를 포함한 그 이전의 미술에서 그런 경향을 쉽게 찾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예술이 그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예술은 분명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제 예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답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마련해줄 수는 있다. 그러니 불편해 하라. 그리고 원한다면, 왜 불편한지 생각해 보라.

 

2.

난 오늘 인터넷에 무려 2,000개에 가까운 서평을 쓴 한 블로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실로 방대한 양이었다. 난 시간을 내어 그 글들을 차곡차곡 읽어 보았다. 개수는 많았지만 각각의 내용이 길지 않아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만일 어떤 예술가가 나에게 그런 불편한 마음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런 식으로 글을 쓴 거라면---아, 어쩌면 그 글은 예술적인 행위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서평가는 그저 자신이 느낀 바를 정직하게 쓴 것뿐이었다. 그는 어떤 책은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깎아 내렸고, 어떤 책은 번역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별로라고 썼으며, 또 어떤 책은 줄거리가 난해하기 때문에 작가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했다. 비슷한 이유로 어떤 책은 재미가 있어서 좋았고, 전개가 흥미진진해서 즐거웠다고 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생각을 쓸 권리가 있다. 그리고 '어쩌면' 나에게는 그의 생각을 비판할 자격과 권한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무려 2,000편에 가까운 서평을 쓸 동안 자신이 읽은 책에서 별다른 문제의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무척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00편의 서평을 쓸 동안, 그는 우리가 예술작품이라고 부르는 것과 우리가 대중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을 계속 동일한 관점에서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만일 주어진 모든 상황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런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나에게 예술이란 문명이 만들어 낸 여러 양태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 마음가짐 앞에서 문제의식란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때 우리가 할 수 있는 표현이란 경배와 찬양, 그 갈래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구도자가 아니고 그렇게 되기도 어렵다. 외롭고 병들고 늙고 비교당하며 많은 것들에 갈등한다. 어떤 사람은 그때의 감정을 글로 풀어서 설명하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음악으로 표현한다. 누군가는 그림으로, 몸짓, 표정으로. 그런 표현이 일관된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걸 예술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렇다. 예술은 그저 만족과 행복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3.

이 문제는 2,000개의 서평을 쓴 그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직접 쓰진 않았지만 우리는 마음속으로 2,000개가 훨씬 넘는 서평을 써 왔다. 그게 사람에 대한 것이든 정치에 대한 것이든 연예계에 대한 것이든. 그들이 만일 오직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음악을, 혹은 역사를, 정치를, 또는 여러 동료들에 대한 서평을 마음속으로 써 왔다면, 나에게 그리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런 관점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논할 여지가 있다. 누군가가 문학을 오직 판매부수로만 판단하려 한다면, 누군가가 영화를 오직 재현능력으로 줄 세우려 한다면, 그런데 그 방식에 동종할 수 없다면, 그들의 판단에 입을 열 자격이, 아니 가치가 우리에게 있다.

 

이 방식은 '만족과 행복'처럼 우리에게 곧바로 영혼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정말 제대로 된 길인지 검토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뿐이다. 바보 이반이 느끼는 결과적 행복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계기와 기회 역시 소중한 것 아니겠는가?

 

4.

모든 것에서 만족과 행복을 발견하라는 그들의 말은 궁극적인 관점에선 올바른 지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과연 그것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공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