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를 동화라고 부르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부룰 수 있다. <어린왕자>를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이야기하듯, 이 책 역시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말할 수 있다. 동화의 메시지는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되어 있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하고 권선징악의 형태를 띠고... 그러나 이 소설은 동화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환상문학이라는, 보다 예술성 있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동화에서는 선과 악을 각각의 인물들에게 독자적으로 부여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선과 악이 모든 사람들 안에 동시에 잠재한다. 반쪼가리 자작은 선과 악이 분리된 한 인간의 이미지이다. 그런 은유를 통해 이 소설은 스스로를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변모시켰다. 무엇보다도, 선은 무조건 좋은 것, 악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이분별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윤리 문제로 소설을 이끈다.
소설 속 마을 주민들은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104쪽)을 받는다. 이것은 선의 강요(비인간적인 덕성)가 오히려 악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갈등은 선한 반쪽과 악한 반쪽이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고조된다.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선한 반쪽과 악한 반쪽은 결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칼비노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쓴다. "지렁이는 자기 입으로 자기 꼬리를 먹었고, 독사는 이빨로 자기 몸을 물었으며, 장수말벌은 바위 위에서 자기 몸을 짓이겼다. 그렇게 모든 것들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로 몸을 돌렸다."(112쪽) 즉 이 결투는 외적으로 두 명의 싸움이지만 실은 자신과 자신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내면 속 악함과 선함의 싸움이며, 심지어 악함과 선함의 명확한 구분이 어려운 싸움이다. 칼비노는 인간의 이런 면을 아이의 눈을 통해 응시하여 동화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외삼촌은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사악하면서도 선한 온전한 인간으로 되돌아왔다."(114쪽) 이것이 칼비노가 우리에게 전하려고 했던 단 하나의 문장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온전히 선하지도, 온전히 악하지도 않다. 사악하지도 선하지도 않고, 사악하면서도 선할 뿐이다. 그러나 종종 우리가 그와 같다는 걸 쉽게 잊어버린다. 우리는 우리가 아주 선한 것처럼 행동하고, 반대편의 저쪽은 아주 악한 것처럼 말한다. 그와 동시에 악하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돌팔매질을 한다. 우리는 선하기 때문에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으며.
이 소설에서 가슴이 뭉클한 부분이 있다면 트렐로니가 어린 주인공을 떠나는 장면이다. 그는 쿡 선장과 함께 배를 타기도 한, 위험한 여행을 수없이 한 인물로, 모험을 상징한다. 어린 주인공이 트렐로니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탐험 중이었던 트렐로니의 배가 난파를 당한 뒤 주인공 마을 사람들에게 구조된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인물은 현실 감각이 뒤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트렐로니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하지만 트렐로니는 항상 갑판 밑 선실에서 카드 놀이를 했기 때문에 세상 구경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31쪽)
세상을 모르는 인물, 트렐로니. 트렐로니는 주인공과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현실 속 어른들은 조금도 좋아하지 않을 모험을 즐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트렐로니는 쿡 선장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고 곧 쿡과 함께 떠난다. 트렐로니와의 이별은 주인공이 모험과도 이별하게 됐음을 뜻한다. 트렐로니가 떠나자 주인공은 "의무와 도깨비불만이 가득 찬 우리의 세계에 남아"(116쪽)있게 되었다. 이것은 이 소설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소설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잠깐 동안 누렸던 '사치스러운' 재미를 뒤로 한 채, 부모와 남편과 아내와 자식과 회사와 사회와 국가가 부여한 의무 속으로 뛰어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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