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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경 옮김 (열린책들 2014)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5. 1. 25.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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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적을 만들다>는 이 책에 포함된 여러 주제들 중 이해하기 쉬운 동시에 시사성과 대중성을 띤 거의 유일한 글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 책의 첫 글로 선택된 것일 텐데---밑에 간략하게 써 놓은 평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이 이후에 등장하는 글들은 조금 어렵거나 일반인들이 쉽게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는 아니다.

 

풍자를 좋아하는 에코답게 심심찮게 풍자를 집어넣었다. "군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에게 마지막 희망"(37쪽)이라거나 "19세기까지는 전쟁에서 가장 용감한 사회 구성원들은 죽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살아남았다면, 현대의 기술은 도심지에 폭격을 퍼부어 이 문제 역시 해결하게 되었다."(같은 쪽)라거나. 그런데 이런 문장을 풍자가 아니라 '실제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 그 자체'로 인식하는 독자들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에(풍자는 그걸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이해력과 유머를 요구한다), 예전 그의 풍자 글처럼 <적을 만들다> 역시 일부 혹은 많은 독자들의 공격(그의 글은 말장난에 불과하다)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적을 만들다>에 대한 생각은 일전에 쓴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대신한다.

 

절대와 상대

절대와 상대에서 에코는 '절대'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한다. 절대라는 것은 "다른 것에 종속되지 않고 그 자체로 이유와 근거를 가지며 설명되는 무엇"(42쪽)인데, 에코에 따르면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절대에 대한 설명은 동어반복이고 추상일 뿐이며 곰곰히 생각해보면 전혀 구체화할 수 없는 것이기에, 절대란 실체가 없는 무엇이다.

 

이런 절대에 대한 의구심은 진리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절대적인'은 그와 반대편에 있는 '상대적인'과 연결되고, 그런 상대주의의 "명제의 참과 거짓을 밝히는 여러 방법이 있다는 주장은 절대적인 진리를 인식하는 가능성에 의심을 드리우기 때문"(62쪽)이다. 현대에는 진리가 단 하나라는 주장보다는 다양한 관점에서 존재할 수 있다라는 주장(예를 들어 문화 상대주의)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이 지나치게 확장시켜 진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의 모든 개념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에코는 다양한 관점의 진리를 수용한다는 것이 곧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걸 의미하지는 않으며, 과학적 진리는 끊임없는 검증과 수정의 대상이기 때문에 과학적 진리가 신앙의 진리(계시) 혹은 인성을 파괴(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사실이란 없고 해석만 있다>는 니체식의 주장이 힘을 얻을 수도 없다고 말한다. 즉 그는 진리란 없고 모든 게 상대적이라거나 해석만이 있다는 주장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절대는 아마도 존재하지 않거나, 만약 존재하더라도 생각할 수 있거나 달성할 수 없을"(70쪽) 무엇이지만---자연의 힘들은 우리의 해석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면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죽음'처럼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진리는 우리가 의심할 수 없는 유일한 형태이자 아주 소박한 기준이라고 에코는 말한다. 절대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예측할 수 있는 것은 겨우 그 정도뿐인 것이다. 그래서 에코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존 키츠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이 그대가 이 세상에서 알 수 있는 전부요, 알아야 할 전부>다."(70쪽)

 

불꽃의 아름다움

<불꽃의 아름다움>에서는 에코 특유의 방대한 지식이 펼쳐진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고대와 중세의 다양한 참고문헌들이 그의 글을 채운다. 이런 식이다: 누구는 불에 대해 이렇게 말했고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책에는 이렇게 표현했고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불은 이런 느낌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따라서 이 글 전반에 에코 특유의 어떤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근세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불꽃에서 받은 인상들을 백과사전식으로 써 놓은 글이기에, 그가 불꽃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정리차원에서 쓴 글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그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통해 자신이 이런 식으로 글을 쓴 이유를 밝히고 있다: "모든 상징이 그러하듯이 불이 가진 상징도 모호하고 다의적이며 상황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들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불에 관한 정신 분석이 아니라, 우리의 몸을 데우기도 하고 이따금 죽음으로도 몰아넣는 불이 가진 다양한 의미들을 살펴보면서, 개략적이고 느신한 기호학적인 탐구를 하려고 한다." (75쪽)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의미를 퇴색시킬 필요는 없다. 이제 일상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캠핑에서 피우는 모닥불이나 점점 대중화되어 가는 향초는 그 그리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불에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이 받았던 불에 대한 영감을 인식하게 되고, 전에는 별다른 생각없이 바라보던 혹은 막연히 이상한 감정만 느끼던 불꽃을 색다른 경험으로 승화시키게 될 것이다.

 

보물찾기

보물찾기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에코의 풍자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서 보물은 특히 가톨릭의 성물들을 가리키는데, 우리가 과연 그것을 진정 보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풍자 형식으로 나타내고 있다. 가령 예수의 손과 발에 박힌 못, 예수가 매질을 당했던 기둥,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 아기 예수의 할례 의식에서 잘라낸 음경의 포피, 예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 아기 예수의 구유, 예수의 시신을 감싼 것으로 전해지는 사크라 신도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길 때 사용한 린넨 수건, 아기 예수를 둘렀던 강보, 마리아의 머리카락과 모유, 머릿수건, 요셉의 결혼반지, 약혼반지, 허리띠, 지팡이와 그 파편, 가리옷 사람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대가로 받았던 은화 30닢 중 한 닢, 안토니오 성인의 혀과 손가락, 야누아리오 성인의 혈액, 유디트 성녀의 몸 일부, 성 안토니우스의 팔, 베네딕토 성인의 팔성녀 아가타의 대퇴골, 하퇴골, 양쪽 팔뼈, 젖가슴, 척골, 요골, 팔뼈, 손가락 등등.

 

이런 보물들을 바라보는 에코의 시각은 그가 아토스 산에 있는 한 수도원의 도서관 사서 수도사에게 물었던 질문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 그가 매일 아침 새벽에, 그리고 한없이 이어지는 장엄한 종교 의식 동안에 마음을 다해 입을 맞추는 그 성유물들이 진짜라고 믿는지."(107쪽) 에코는 수도사의 대답을 다음과 같이 썼다 "문제는 성유물의 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있으며, 그는 성물에 입을 맞추면서 신비스러운 향기를 느낀다고 했다. 요컨대 성유물이 신앙심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그 유물을 만든다는 것이다."(107쪽)

 

에코는 자신이 그 수도사의 대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부연설명하지 않는다. 에코는 예수가 타고 다니던 당나귀의 배설물도 공경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했는데, 굳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보물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쭉 열거한 것을 보면, 에코는 이들이 진짜 보물이 아니라 (혹은 보물인 동시에) "가치가 높은 관광 <상품>"(116쪽)이자 "물질주의적인 신화라고 정의할 수 있는 어떤 충동"(같은 쪽)에서 비롯되는 것들일 뿐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에코가 그렇게 단순히 여러 문화 속 보물(유물)들을 무의미한 것 혹은 가치가 전도된 것으로 깎아내리고자 이 글을 쓴 것 같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중세의 어떤 필사본처럼 구하기 어려운 책을 손에 넣기라도 하면 그걸 보물처럼 다룰 엄청난 책 수집가이기 때문이다. 그는 보물이라는 것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의미가 다룰 수 있음을 잘 알 것이고, 그렇기에 저 수도사의 대답에 대해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은 거라고 볼 수 있다. 즉 나는 이 <보물찾기>에서 에코가 두 가지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보물이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이다.

 

들끓는 기쁨

<들끓는 기쁨>은 캄포레지에 대한 일종의 헌사를 읽는 느낌이었다. 에코는 캄포레지가 쓴 다양한 주제의 흥미로운 글들을 여러 번 인용하면서, 캄포레지의 이 열렬한 묘사를 읽고 감탄해 보라고 권유한다. 실제로 에코가 인용한 캄포레지의 글을 보면, 저주받은 치즈, 기괴한 미라, 시체가 썩어가는 광경,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 각종 요리들, 악당들의 목록 등 현란하기 그지 없다. 에코가 소설을 쓸 때 캄포레지의 글을 탐욕스럽게 인용했다고 말할 정도니 캄포레지의 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캄포에지의 인용문만 보아도 그에 대한 오라를 느낄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에코가 이렇게까지 존경하는 캄포레지의 글을 국내 번역본으로는 구해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천국 밖의 배아들

<천국 밖의 배아들>은 배아를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즉 배아가 영혼을 가지는가에 대한 첨예한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에코가 여러 번 이야기했듯, 그의 목적은 논쟁에 가담하는 것이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배아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므로, 인공유산과 생명보호 같은 민감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에코가 쓴 글이 하필이면 현재 기독교 입장과 배치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배아 이론을 설명하는 것인 데다가, 글에서도 직접 "배아까지를 대상으로 삼는 생명 보호 운동은 기독교 근본주의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142쪽)라고 언급하기 때문에, 인공유산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글이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반대론자들도 (만일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면)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왜 배아를 인간으로 보지 않았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기독교에서 자주 인용하고 존경하며 또 성인으로 모시는 토마스 아퀴나스이기 때문이다. 에코의 이 글도 그 정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에코는 다음과 같이 썼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교회와 생각이 달랐다는 점에 특별한 호기심을 느껴 아퀴나스 성인의 견해를 다시 고찰하게 되었다."(132쪽)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은 제목에서 드러나듯 위고의 독특한 표현 방식(과장, 과잉)에 관한 에코의 생각을 다루고 있다. 에코가 바라보는 위고는 "모든 것이 매우 과장되었다."(156쪽) 위고가 쓴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행동이나 외모에 대한 도를 넘어선 추악한 묘사가 에코의 증언에 따라 이어진다. 이어,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몇 페이지에 걸쳐 장황하게 늘어놓는 위고의 방식에 대해 에코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그는 "독자들이 그 페이지를 건너뛰리라는 것을 위고가 알았다고 확신"(172쪽)한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독자들의 눈을 돌릴 수 없도록 만드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에코는 위고의 이런 과잉이 독자를 압박하여 오히려 그것의 위력을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신선한 발상이 아닌가! 장대한 목록, 지칠 정도로 풍성한 묘사에서 독자들은 길을 잃고 말지만 곧 그런 실로의 처지야말로 그 소설에서 위고가 노리는 바라는 것이다. 마치 광장에서 길을 잃은 것처럼, 구름 관중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처럼, 외국에 갓 도착한 이방인이 술집에서 이름 모를 자들에 대한 잡담을 듣는 것처럼. "이 책의 결함들(특히, 수사적인 무절제)을 열거하고 분석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상처에 천천히 칼을 밀어 넣으려는 순간 그 결함들은 오히려 멋있게 보이기 시작한다."(157쪽)

 

우리가 일반적으로 단점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과잉으로 대하는 자세, 에코는 그것에서 위고의 천재성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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