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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 박애 혹은 동지애

생각이라는 말벌/2010년대

by solutus 2015. 1. 24.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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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프랑스 대혁명의 3대 정신이 "자유, 평등, 박애"라고 배웠다. 네이버에 '자유, 평등'이라고 치면 연관 검색어에 '박애'가 뜨는 데, 그걸 보면 요즘도 많이 통용되는 구호인 것 같다. 이 구호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코뱅 클럽에서 카미유 데물랭 등과 함께 외친 것으로, 1848년에 이르러 혁명의 구호로 공식 채택되었다. 그런데 '박애'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fraternité'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박애'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fraternité'의 의미는 '우애, 유대감, 동지애' 정도로 나온다.

 

'박애'는 '우애, 동지애'와는 뜻이 상당히 다르다. 박애는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인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우애 혹은 동지애는 '마음이 맞는' 혹은 '뜻을 같이한' 사람들 간의 사랑을 뜻한다. 즉, 보편적인 사랑이 아니어서, 친분이든 지역이든 혈연이든 목적이든 간에 그들 사이에 어떤 유대감이 형성된 관계를 지칭한다. 박애가 말하는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그러나 우애, 동지애가 말하는 사랑에는 울타리가 존재한다.

 

원래 프랑스 말과 뜻이 너무나도 다른 박애라는 단어가 번역되어 쓰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일본의 잘못된 번역이 그대로 쓰인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잘못된 번역인 줄 알면서도 수십 년간 그대로 사용하는 걸 보면 단순히 오역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래도 '동지애'라는 단어가 풍기는 '공산주의, 빨갱이스러움 혹은 노동운동'이 당시 철저한 반공 분위기와 노조 탄압 정책과 맞물려 기피되었던 것은 아닐까.

 

결과적으로 보면 박애라는 아주 훌륭한 단어가 동지애라는 단어를 대체한 것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 단어는 시민(혹은 부르주아)들이 일으킨 혁명의 뜻을 보다 숭고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동지애나 형제애 같은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유대감이 형성된 이들끼리의 사랑을 뜻하는 저 단어는 그들끼리의 무조건적인 사랑, 내 식구 감싸기 식의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한편, 더 나아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한 배척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동지애' 혹은 '형제애'라는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혁명 기간 동안 길로틴 처형과 방데 진압과 같은 수많은 살육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애라는 구호 아래에서는 저런 일들이 일어나기 어렵다. 동지애 혹은 형제애라는 구호 아래 단단히 뭉쳐, 우리 아니면 적이라는 마음 가짐을 가져야 일련의 살육이 점화될 수 있는 것이다.

 

 

* 물론 '동지애'라는 단어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동지애가 지닌 뜻은 훌륭하다. 가족이라는 말이 '너는 우리 가족이니까' 혹은 '너는 우리 가족이 아니니까' 식의 '구분'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기 전까진 그 자체로 아주 좋은 단어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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