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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칼에 베이다

나침반과 지도

by solutus 2020. 11. 19.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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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칼에 찔렸다. 여태껏 수십 년간 요리하면서 단 한 번도 식칼에 베여본 적이 없었는데 도루코 면도칼을 붙여 만든 빵칼에 손가락 피부가 찔려버렸다. 멋지게 부풀어 오른 빵 반죽에 칼집을 내려고 빵칼을 꺼냈고, 그 빵칼에 둘러놓은 키친타월을 벗겨내려다가 순식간에 찔려버렸다. 서둘러 살펴보니 약 1.5cm의 길이의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와중에도 얼른 손가락 마디를 움직여 보았다. 찔린 위치가 펴는 힘줄에 가까워 혹시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다행히 이상이 없었다. 우선 이에 안도했다. 힘줄을 다치면 재활도 해야 하고 여러모로 골치가 아프다. 그 후 다친 손가락 주변을 만져 감각을 확인해 보았다. 감각이 살아 있는 걸 보니 신경도 다치지 않은 듯했다. 찔린 위치상 신경, 동맥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래도 깊이 찔린 것 같았다. 좌우로 벌어진 상처로 꽤 많은 피가 흘러나왔는데 쉽게 지혈이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피하 정맥을 벤 것 같았다. 찔린 부위가 인대와 가까웠는데 인대 손상 여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힘줄이 손상되지 않을 걸 보면 인대도 다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깊게 찔렸는데 그나마 운이 좋았다.

 

지혈하고자 압박을 했다. 하지만 베인 피부가 좌우로 벌어져 압박하는 게 쉽지 않았다. 병원을 갈까 했는데 시간이 늦어 근처에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상처는 몇 분 만에 부어올랐고 그 때문에 벌어진 상처를 억지로 닫으면 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혈소판이 피떡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텐데 그때까지 상처를 붙잡고 있을 순 없었다. 다행히 약국은 문을 연 곳이 있었다. 계속 누르고 있는 게 힘들어서 아내에게 지혈제를 사달라고 했다. 아내는 응급실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난 응급실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가더라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거나 나 혼자 가야 했는데 딱히 마음에 드는 선택지가 없었다. 병원 특성상 한 번 가면 계속 가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아내가 분말형 지혈제(니라마이드산)를 약국에서 사 왔을 땐 지혈이 어느 정도 되었지만 피가 완전히 멎지는 않은 상태였다. 할 수 없이 지혈제를 뿌렸다. 이런 분말 치료제는 지혈에는 도움이 되지만 상처를 빨리 낫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루 뒤에 분말을 제거하니 다시 피가 나왔다. 자연적으로 나으려면 4주 이상의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했다. 

 

피부 봉합 수술 전. 2020.11.19.

결국 병원에 간 건 우선 2차 감염 우려 때문이었다. 아무리 깨끗한 빵칼에 찔린 것이라 해도 오랫동안 아물지 않은 채 놔두면 황색포도상구균 등에 감염될 수 있었다. 9년 전에 파상풍 주사를 맞긴 했지만 10년이 다 되어가니 그것도 염려스러웠다. 2차 감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아무는 데 오래 걸리면 장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봉합해서 빨리 나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기게 들리겠지만 새로 구매한 테니스 연습 공이 뜯지도 않은 채 현관에 놓여 있는 게 마음에 걸렸다. 늦게라도 봉합을 하면 2주는 빨리 나을 터였고, 그럼 한겨울이 오기 전에 테니스를 몇 번이라도 더 칠 수 있었다. 물론 그간 고생할 아내 생각이 제일 컸다.

 

피부 봉합 수술 후. 2020.11.19.

정형외과 원무과에 접수하면서 손가락을 칼에 베였다고 했다. 그 말에 간호조무사 한 분이 벌떡 일어나 생리식염수로 드레싱을 해주었다. 그새 지혈이 잘 됐는지 피는 나지 않았다.

 

의사는 왜 바로 오지 않았느냐며 타박한 후 우선 엑스레이를 찍으라며 방사선실로 보냈다. 뼈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이물질 등이 있을 수 있기에 촬영을 하는 듯했다. 그런데 의사는 손가락에 감각이 있는지, 손가락은 잘 움직이는지 등을 묻질 않았다. 신경은 그렇다 쳐도 손가락이 잘 움직이는지는 물을 만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련히 의사가 잘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 느낌과는 다르게 깊게 베인 상처로 보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피부를 꿰매기 전에 상처를 벌려 힘줄 등의 손상을 확인해 보긴 했을 것이다. 물론 피부 봉합만 했다가 나중에야 인대가 손상된 걸 발견했다는 사고 사례가 있기는 하다. 내가 그 케이스는 아니길 바란다. 내가 빵칼에 베였다고 하자 의사는 그럼 파상풍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했다.

 

처치실로 가서 상처를 소독했다. 간호조무사가 무언가에 적셔진 솜으로 상처를 문질렀는데 아마도 소독용 에탄올일 것이다. 부분 마취 후 봉합하고 항생제 주사를 맞고 약국에 들러 약을 샀다. '크라부틴정'이라는 경구용 항생제도 들어 있었다.

 

앞으로 이틀에 한 번씩 내원을 해야 한다. 소독도 하고 봉합 부위의 피부가 괴사하는지 등의 경과도 보려는 것일 테다. 여하튼 한 번의 방심이 이런 결과를 부른다. 이때 만든 빵은 그야말로 피땀 흘려 만든 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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