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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오늘날의 토테미즘>, 사륜마차도 지나갈 관점의 격차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10. 3. 01:58

본문

1.

<오늘날의 토테미즘>의 저자인 레비 스트로스는 책에서 족외혼의 문제를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도 그 문제가 무엇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 족외혼의 문제는 여러 지성인이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150년 이상 지속하고 있는 해묵은 논쟁 중 하나로, 이 책에는 족외혼제 논쟁에 참여했던 학자들이 처음부터 대거 등장한다. 족외혼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존 퍼거슨 맥레넌, <근친상간 금지와 그 기원>에 대해 쓴 에밀 뒤르켐,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을 쓴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정신질환과 신경증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며 <토템과 터부>를 쓴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등. 레비 스트로스는 토테미즘 및 원시인의 신화와 관련된 자신의 관점을 전개하기 위해 위 학자들을 계속 인용하면서 족외혼제 또한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그러면서도 족외혼에 대한 개론적 설명을 조금도 덧붙이지 않았다. 독자가 그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즉 이 책은 개론서나 입문서가 아니다. 만일 독자가 음식이나 성[sex]과 같이 인류의 초기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족외혼을 둘러싼 논쟁에 별다른 지식이 없다면 토테미즘을 인류의 기원과 연결하려 했던 여러 학자와 그에 반박하는 레비 스트로스의 논의를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본적인 설명을 배제한 덕분에 책은 꽤 얇다. 흔히 두꺼울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와 반대된다. 얇을뿐더러 제목마저 친근한 자크 랑시에르의 <사람들의 고향으로 가는 짧은 여행>이 역자와 독자에게 어떤 고난을 안겼는지 생각해 보자. <오늘날의 토테미즘>도 그러한 책 중 하나이다.


특정 독자를 고려한 듯한 레비 스트로스의 글쓰기는 첫 문단부터 잘 드러난다. 그는 샤르코가 주창한 정신의학의 히스테리와 인류학의 토테미즘을 비유하면서도 히스테리가 태생적으로 어떤 문제를 지니고 있었는지를 조금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음은 <오늘날의 토테미즘>의 첫 문단 일부를 옮겨온 것이다.


"병 혹은 객관적 제도에 대한 진단이라는 것이 임의적으로 떼어낸 어떤 현상들을 집단별로 모아놓은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드는 순간 증상조차 사라지는데, 이것은 그런 식의 통합적 해석에 대한 반발을 보여주는 것이다."(9쪽) 


히스테리의 기원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독자는 이 문장을 그저 잘못된 번역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번역이 매끄럽지 않은 문제도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문장을 다듬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제한된 독자와 예상되는 적은 판매 수익 때문에 번역에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친절한 번역 대신 방대한 양의 주석을 달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러면 이 책은 단순한 번역서가 아니라 해설서, 주석서가 될 터였다. <야생의 사고>라는 화려한 꽃을 두고 그 여정에 있는 이 책에 그 정도의 공을 들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저자 자신과 관련 전공자들을 제1, 제2의 독자로 두고 있다. 즉 인류학, 그중에서도 토테미즘을 연구해 본 적이 없는 독자는 이 책을 이해하기가 꽤 어렵다. 그런데도 이 책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은 저자인 레비 스트로스가 대중에게 어느 정도 알려진 유명인이기에 가능하다. 기반 지식이 전무한 채로 다른 분야의 전공 서적을 읽는 것은 무모한 일이지만, 레비 스트로스의 글은 거부하기 힘든 모험심을 자극하는 데가 있다. 그의 책을 보는 시선에는 어떤 교훈이나 지혜, 영감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과 인류사의 위대한 지성이 남긴 글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 뒤엉켜 있다. 인류학 지식이 미천한 독자는 오로지 그 두 힘에 기대어 전진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2.

레비 스트로스는 책의 첫 장, 첫 쪽부터 토테미즘이 인류학자의 사고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화라는 것을 여러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토테미즘은 토테미즘의 존재를 입증하는 특정한 사례의 선택과 토테미즘의 존재를 거부하는 특정한 사례의 배제로 탄생했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보아스가 구상해 낸 토테미즘의 "도식화된 대응 규칙은 너무 추상적이거나 이 요구조건을 다 만족시키기엔 빈틈이 너무 많다."(25쪽) 보아스는 인간-자연 관계와 사회 집단의 특성화 사이의 연결을 우발적이고 사소하며 임의적이라 보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그런 사고 역시 하나의 신화로 보았다. 보아스가 발견한 관계는 우연이 아니라 인류학자의 "사고 작용을 통해 일어난 연결"이었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ㅡ그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유명론'이라는 소제목으로 밝혔듯이ㅡ토테미즘의 탄생을 중세 스콜라 철학의 유명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유명론의 이론을 빌리자면 토테미즘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실체를 설명하기 위한 탄생한 가상의 어떤 것이다. 그의 비판을 다시 읽어 보자. "엘킨은 (...) (오스트레일리아 중부 지역에 거주하는) 아란다족의 토테미즘 같은 것이 통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데도 대강 통합해"(66쪽) 버렸다. "우리 인간은 시스템적 사고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지라 (...) 결국 실제 모습을 결정적으로 저평가하게"(같은 쪽) 된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처럼 과거 대학자들이 빠져들었던 토테미즘의 여정을 따라가며 그것의 환상을 분석하는데, 그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주장은 일견 어려워 보이는 분석 과정을 거쳐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즉 "연구자의 정신이 연구 대상자의 정신보다 (연구에) 더 개입되어 있다."(9쪽)는 서문의 문장이 그것이다. 이 문장은 토테미즘이나 민속학, 인류학을 넘어 과학사, 윤리학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하는 데 있어 언제나 객관을 중시하지만 결국 그 객관은 우리의 관점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객관을 무기로 했던 과학에조차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오랫동안 과학철학을 뒤흔들었던 난제였다. 그 난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서문에서 히스테리를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토테미즘 또한 히스테리와 같다. 토테미즘은 연구자(인류학자)의 정신이 연구 대상자(원시 부족)의 정신보다 더 개입하여 만들어낸 환상이다. 



3.

개인과 단체에 대한 판단 역시 거의 동일하게 적용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거나 저울질할 때, 우리는 그 판단을 객관적이라 평가하고 싶어 하지만 실은 우리의 주관적 정신이 개입하여 그 대상을 분류하고 체계화한 것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런 평가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이는' 지표를 근거로 든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우리 정신의 개입을 전제로 한다. 미술 비평가 존 러스킨이 여러 번 이야기했듯, 화가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다고 믿는 것을 그릴 뿐이다. 레비 스트로스가 오귀스트 콩트의 문장ㅡ"우리가 실재라고, 공상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사실 어떤 구분도 없다"ㅡ을 이 책의 서두에 사용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분류 작업, 혹은 체계화를 완전히 불필요한 일로 여길 수는 없다. 우리의 판단이 구조주의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면 그 구조의 한계 안에서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깨우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다른 이들이 체계화시켜버린 시각에 대항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토테미즘이 신화라는 명제를 알고자 이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토테미즘과 히스테리가 원시 부족과 정신이상자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로 체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면, 우리가 타인에게 내리고 있는 어떤 판단 역시 그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존재로 체계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갈등이 몇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면 경계조차 희미해질 '구분 짓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통일성도, 일관성도 없는, 그저 몇 가지 사례를 짜 맞춘 것에 불과한?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겨우 몇 걸음에 불과할 바로 그 '후퇴'에 있다. 그 몇 걸음의 후퇴가 18세기에 그레트리의 음악을 비난했던 묘사, 멜로디 사이의 격차가 심해 그 사이로 사륜마차가 지나갈 정도라고 했던 비아냥을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면 그 전에 현상을 알아야 한다. 잘못된 점을 알아야만 개선이 가능하다. 그래서 다시 되짚어 본다. 


우리의 관점이 타인을 실제와 다르게 조직화한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확인한 나의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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