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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타부키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 내게 내려진 형벌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9. 10.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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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가상의 독자를 위한 친절한 설명을 곁들이지 않는다. 왜 애써야 한단 말인가. 누군지도 모르고 알 기회조차 없는데? 그들은 내 곁을 쏜살같이 지나가며 부딪히고 터진다. 나를 에워싼 대기를, 그 표면을, 인지할 수도 없는 수많은 유성처럼. 간혹 혜성처럼 불타오르는 자들도 있지만, 결국 지나간다. 그들은 지난 일이 되고 잊힌 자들이 되며 알 필요도 없는 자들이 된다. 나를 실제로 아는 사람들에게도 친절히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나를 어느 정도 안다. 어느 정도. 그 어느 정도가, 하지 않아도 되는 차이를 만든다. 


안토니오 타부키는,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의 작가는 말한다. 페소아라는 포르투갈 출신의 작가를 아느냐고.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답을 듣지 않은 채 쓰고 또 쓴다. 페소아의 이명들과 그들의 업적과 특성을. 하지만 친절하지는 않다. 페소아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글이다. 하지만 이 책을 집어 든 이는 분명 페소아를 아는 사람일 테다. 작가는 독자를 참작하여 글을 쓰고, 따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작가가 고려하는 그 독자는 대체 누구일까? 페소아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그의 불친절을 용인할 수 있을까? 그 독자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이다. 설령 페소아와 카에이루, 캄푸스, 헤이스, 알렉산더 서치, 베르나르두 소아르스를 아는 독자라 해도 작가 자신이라는 독자를 대체할 수는 없다. 제1의 독자이자 다른 독자들이야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독자. 그런데 때때로, 작가가 되고 싶어 하나 절대 작가가 될 수 없는 작가 같은 독자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아니지만 그를 어느 정도 안다고 믿는, 혹은 알고 싶어 하는, 실제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 독자. 그런 이들을 위해 관련자들은 약간의 친절을 베풀었다. 부록을 싣고, 옮긴이는 해설을 덧붙였다. 그런데도 이 책은 여전히 불친절해 보인다. 그런데 불친절이 왜 문제일까? 그렇다면 자신을 알리기 위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단 말인가? 트렁크에서 발견된 페소아의 수많은 유고가 그랬듯이, 안토니오 타부키는 알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유성이 대기에서 불타오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내버려 둔다. 그가 인용한 몬탈레의 말처럼, 지상의 불멸성이란 단지 전문가 열 명의 관심밖에 끌지 못하는 어떤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불멸의 궁전은 친절한 자에게 허용되는 곳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나치는 자에게도, 알고자 하는 자에게도 타부키는 친절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페르난두 페소아라는 불친절한 포르투갈 작가에 대해 안토니오 타부키라는 또 한 명의 불친절한 이탈리아 작가는 타버리는 유성이나 잠깐 화려하게 빛나는 혜성이 아닌 그 이상의 것이 되었다. 페르난두 페소아를 읽는 한 명의 독자, 안토니오 타부키는 친절을 베풀지 않음으로써 절대 작가가 될 수 없는 독자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었다. 그는 아마도 페소아의 주위를 끊임없이 도는 위성의 지위에 서 있을 것이다. 페소아에게서 얼마쯤, 누군가를 애도하고자 할 때 유지해야 하는 거리만큼 떨어진 채. 


안토니오 타부키에게 다행스럽게도 페르난두 페소아는 그의 글을 결코 읽어볼 수 없다. 타부키가 어떤 평을 남기든, 즉 그가 페소아의 위성으로 그 주위를 돌며 어떤 모습으로 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든 페소아는 그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나에게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타부키의 글에 어떤 평을 남기든, 내가 그의 주위에서 어떤 모습으로 일그러지든 그는 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페소아가 타부키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같은 이유로 내가 타부키를 괴롭히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유성 같은 이들은 쏜살같이 지나가며 사라지기에 알아차리기조차 매우 어렵다. 반면 그는, 그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내 주위를 맴돌며 반복적으로 점멸하고, 그렇게 일그러지고 사라질 때마다 내게 유배형을 가한다. 그들은 날 보고 있다고 믿는다. "페소아의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말한다, '올랴르.' 릴케의 등장인물은 끊임없이 말한다, '샤우엔.'"[각주:1] 그리고 이들 역시 끊임없이 말한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고. 타부키가 페소아에 대해 썼고, 내가 타부키에 대해 썼듯, 이들 역시 나를 응시하는 듯 말한다. 그게 무슨 문제일까? 나도 하고 있는 일인데? 하지만 유성과는 달리, 타부키나 페소아 그리고 나와 타부키의 관계와는 다르게, 베풀지 않아도 되는 친절처럼, 그들이 육안에 들어온다. 문제는 그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들은 나를 실제로 알기에 내가 친절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고 나를 떠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어느 정도만 아는 사람들이었다. 특수한 독자가 아니라면 결국 그 어느 정도 안다는 인식이 유성과 위성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위성은 서서히 사라지며 세상을 암흑에 가두지만 갑자기 나타나며 불을 밝히기도 하는 이중적 존재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순환계의 존재. 친절을 미덕으로 여기는, 불멸의 궁전을 지키는 또 다른 문지기.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내 괴로움 또한 없었을 것이다. 아니, 덜했을 것이다.


그러나 식어버린 포르투풍 내장 요리라 해도 굶주린 배를 위로해 줄 수는 있었다. 아무리 그가 "나에게 사랑을, 식은 내장 요리처럼 가져다주었다"[각주:2]고 항의하더라도 그 식어버린 요리가 없으면 그만큼의 즐거움 역시 존재할 수가 없었다. 위성은 빛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을, 즐기는 만큼 괴로우며 괴로운 만큼 즐기게 된다는 삶의 진실을 드러냈다. 아이가 없다면 아이를 키우는 데 드는 어려움을 모르겠지만, 그 어린아이가 "오른팔로 코를 닦고 / 웅덩이에서 물장난을 하고 / 꽃을 꺾고 그 꽃을 사랑하고는 잊어버리는"[각주:3] 모습에서 오는 기쁨 역시 모를 수밖에 없다. 결혼이란 결국, 알랭 드 보통이 언급했듯, 어떤 종류의 고통을 기쁘게 견딜지 결정하는 문제에 속했다. 그러니 난 타부키가 페소아에 관해 쓴 이 글에 대한 소감을 다음의 인용문, 타부키가 옮겨 놓은 페소아의 시로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한 가지, 잔 하나, 미풍 하나, 문장 하나가 빠져 있고 / 삶은 즐기는 만큼 또 고안해내는 만큼 고통스럽다."


타부키와 페소아는 반의 행복이 반의 고통을 준다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이것이 바로 내게 내려진, 내가 운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 합당한 형벌이었다. 난 판결문을 받아들일 작정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나를 어떻게 찾아 선고를 내린단 말인가? 내가 페소아처럼 이명을 만들어 내고, 이명이 아닌 척하며, 이명인 척하는 이명을 트렁크 가득 만들어 낸다면? 내가 누군지 모른다면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릴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과감히 다른 세계에 들어섰다.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그곳엔 거대한 청동문 하나가 서 있었다. 문에 다가서자 머리가 셋 달린 까만 개 한 마리가 나를 보며 꼬리를 흔들어댔다.



  1.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 (문학동네 2016), 90쪽 [본문으로]
  2.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김한민 옮김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 2018), 75쪽 [본문으로]
  3.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사람들이 가득한 트렁크> (문학동네 2016), 177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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