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경희 <마키아벨리>, 단순한 설명문이 아닙니다

텍스트의 즐거움

by solutus 2019. 9. 5. 14:12

본문

1.

우리는 멀리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목적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곤 한다. 김경희가 쓰고 아르테 출판사가 펴낸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와 그 인근 도시의 풍경을 도판과 함께 서술하고 있어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에 대한 관심 외에 여행지 선정에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접하는 독자들도 있는 듯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조언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엔 되도록 여행을 다니지 말라고 말이다. 이들은 여행을 다니며 시간을 소모하는 대신 자신을 위해 투자하라고 말한다. 이런 조언엔 대개 비웃음 섞은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리 쉽게 넘길 말은 아니다.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진실은 우리가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엔 아는 것이 많기 어렵고, 그렇기에 같은 시간을 들이더라도 여행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여행에서 보낸 시간은 결국 소모적으로 버려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젊은 시절의 여행에서 '남은 것은 사진뿐'이라고 자조하는 것은 그것이 추억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당시 볼 수 있는 게 그만큼 적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여행을 미루는 것 역시 이치에 바르다고 볼 수는 없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는 것의 기준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알아야 여행의 가치가 살아나는지는 그 누구도 알려줄 수 없다. 아는 만큼 보겠지만, 여행 역시 견문을 넓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아는 것은 꼭 책이나 주입식 암기가 아니라 우연한 경험을 통해서 얻어지기도 한다. 젊은 시절 여행의 가치란 단순히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여행하는 자의 태도에 달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여행이 꼭 지식을 넓히는 수단이 될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여행이란 그저 그 낯선 체험만으로도 삶의 의지를 북돋아 주는 것이기도 했다. 


여행의 목적을 단순한 기분전환이 아니라 어느 정도 견문을 넓히는 데 두고자 한다면 이 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마키아벨리에게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 더욱더 그렇다.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기 전 이 책을 선택한 독자는 그런 바람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을 테다. 그건 아는 것을 늘려, 볼 수 있는 것을 넓히려는 시도이다.



2.

우려할 점도 있다. 이 책은 단순한 설명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엔 마키아벨리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담겨 있는데 그 관점은 마키아벨리에게 우호적으로 치우쳐져 있다. 비판적인 시각을 좌우에서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호적인 쪽에 고정하고 있기에 저자의 생각을 그저 따라가다 보면 독자 또한 사고가 한쪽으로 치우쳐질 수 있다. 즉 역사를 대립과 투쟁으로 간주하고 폭력이나 비윤리성의 불가피성을 허용하게 될 수 있다. 어쩌면 독자는 이 책을 읽은 후 마키아벨리를 위대한 영웅이라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가와 시민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인물로 말이다. 저자가 독자에게 가할 수 있는 치우친 사고는 독자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볼 수 있는 것을 넓히려는 시도가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저자의 주관적 시각을 잘못된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특별히 비판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리고 해당 위인이 큰 비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우리는 그 위인을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과오가 없는 인간은 없으니 모두에게 중립적인 시선을 요구할 수는 없다. 과거 해당 위인의 행적이 비판으로 얼룩져 있었다면, 그에게 기회주의자나 결과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면 새로운 해석은 관용과 호의에 더 쉽게 다가가기 마련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도 있다. 저자의 마키아벨리에 대한 해석처럼 말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를 향한 우호적 재평가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미 18세기부터 마키아벨리는 공화제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평가는 <군주론>이 아니라 <로마사논고> 덕분이라 할 수 있다. <로마사논고>에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입장 덕분에 <군주론> 역시 좋은 방향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몇 세기에 걸쳐 이어지고 있다. 저자 김경희 또한 오래전부터 주장되어 왔던 마키아벨리에 대한 우호적 관점을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그러니 만일 독자가 주류의 평가를 중시한다면 마키아벨리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깊은 독자라면 다음의 항목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3.

먼저 마키아벨리가 저자의 주장대로 정말 생전에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저자는 글 전반에 걸쳐 마키아벨리가 기회를 얻지 못했으며 "국가 경영에 대한 그의 혜안이 지금 인정받는 것의 반만이라도 당대에 인정받았다면"(157쪽) 좋았을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피렌체의 장관직에 올라 그로부터 14년 동안이나 피렌체를 위해 일했다. 피렌체가 소국으로 몰락한 것이 마키아벨리를 끝까지 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14년간 피렌체의 고위직에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책임이 없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마키아벨리의 14년간의 고위 공직 생활보다는 메디치가의 정계 복귀 이후에 그가 중용되지 않은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그가 생전에 충분히 인정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저자는 "중세에는 신만 사랑했기 때문"(34쪽)에 단테가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묘사한 것과 같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이성에 대한 사랑이 당시(르네상스 초기)에는 아주 새로운 것"(같은 쪽)이었다고 썼다. 그러나 중세에는 신만을 사랑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 고결하고 성스러운 연인과의 사랑을 노래한 서정시가 이미 12세기에 프로방스 지역에서 크게 발달하였기 때문이다. 프로방스의 서정시는 이후 북부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그곳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저자는 단테가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를 묘사하면서 "중세의 (신을 향한) 사랑법에 마침표를 찍었다"(같은 쪽)고 했지만, 단테는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대상을 사랑으로 묘사한 것이 아니라 묘사법을 자신만의 형식(청신체)으로 만들어낸 작가라고 봐야 한다. 


귀족들이 정원에 우물을 판 이유가 "당시 어느 정도 사는 사람들은 독살을 피하기 위해"(144쪽), 그리고 "피렌체 역사를 피로 물들인 파벌 대립 탓"(같은 쪽)이라고 설명하는 부분들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런 식의 해설을 객관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집의 마당에 우물을 판 것은 독살 예방보다는 멀리 물을 길으러 가야 하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물론 저자가 말한 목적도 이유로 들 수는 있겠으나 그건 주된 목적이라기보다는 부수적 효과였다. 당시 피렌체 귀족의 행실과 그 역사를 대립과 정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장만을 근거로 당시 세계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당시 시대를 균형 잡히지 않은 해석 위에 올려놓을 우려가 있다.


이 밖에도 유심히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다음의 주제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마키아벨리를 옹호하려는 저자의 주장은 '정의'를 다루는 문제에서 가장 큰 시련을 맞이하게 된다.



4.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군주의 비윤리성이나 폭력성을 일시적으로 허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을 옹호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로마사 논고>에서도 마키아벨리는 폭력의 한시적 사용을 인정한다. 중요한 것은 바로 사익이 아닌 공공선이다. 지도자가 나라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비윤리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용납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 불가피성에 대한 인정이다."(208쪽)


이런 논지는 책의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이 주장을 요약하자면, '혼란과 위기의 시기엔 일시적으로 폭력적 방법을 허용해야 하는데, 그것이 다수의 시민을 위해 더 좋다'는 것이다.


'정의'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이 대목에서 고장 난 열차의 예시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예시는 다음과 같다: 고장 난 열차가 선로를 이탈하여 일꾼 열 명이 일하는 곳으로 돌진하고 있다. 열차가 일꾼을 치게 되면 100% 확률로 열 명의 사람이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당신이 멀리서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고 그 위험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마침 그때 당신 옆에 한 사람이 서 있다. 당신은 그를 선로 위로 밀쳐 열차와 부딪히게 함으로써 열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은 그를 밀어 열 명의 목숨을 구하겠는가?


이 경우 마키아벨리는 사람 한 명을 밀어 열 명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열 명의 목숨이 위험한 '위기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책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논지다. 얼핏 보면 사람 한 명의 목숨으로 열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으므로 옳은 행동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의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그런 선택에 많은 문제가 뒤따른다는 걸 알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지닌 가치를 숫자로 환산하여 비교할 수 있는지, 위대한 한 사람의 생명은 열 사람의 평범한 목숨보다 가치 있을 수 있는지, 더욱더 많은 수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희생을 강요당해도 되는지 등등. 즉 어떤 선택이 시민에게 '더 좋은' 선택인가 하는 물음은 가치관에 따라 답이 달라질 수 있는데도 저자는 이에 대한 사려 깊은 연구 대신 공리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마키아벨리와 저자는 권모술수를 최우선으로 두는 것을 '위기의 시기'로 한정하고 있었지만, 그 위기를 어떻게 정의할지는 밝히지 않았다. 이런 관점을 비판 없이 수용한다면 군주가 현 상황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으로 위기라는 자의적인 판단하에 수시로 계엄령을 내리는 것을 용인해야만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마키아벨리가 도덕보다 정치를 앞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부분이다. 그 예로 "마키아벨리의 근대성은 바로 이렇게 도덕주의 정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200쪽)라는 식의 표현을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만일 저자의 말대로 마키아벨리가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내며 자유롭고 공정한 법이 지배하는 나라가 좋다고 보았"(202쪽)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힘의 관점'에 기초"(같은 쪽)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상황에 따라 악해질 필요가 있다면, 그런 식으로 도덕을 뒤에 놓을 수 있다면, 시민들에게 애국심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강대한 국가의 건설을 위해서 시민을 애국심으로 뭉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애국심은 개인의 자유보다 도덕적 의무를 중시하는 마음가짐이다. 애국심은 자기에게 가까운 자를 먼저 위하는 것이 옳다는 도덕적 의무감에서야 발현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러한 도덕을ㅡ마키아벨리가 주장하고 저자가 옹호하는 것처럼ㅡ때에 따라 저버릴 수 있다면 시민에게 애국심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국가가 전쟁의 위기에 빠졌을 때 자신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에 나서기보다는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해지는 법을 배우는 건 군주만이 아니다. 만일 군주가 때에 따라서 도덕보다 정치를 앞에 둔다면, 시민 역시 도덕적 의무감이 필요한 애국심보다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인식에 따라 자신의 안위를 앞에 둘 것이다. 시민의 그러한 태도를 권모술수와 힘으로 누른다면 당장은 통할 수 있으나 그런 정권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상황에 맞춰서 때로는 군주제가, 때로는 공화제가 더 좋다는 식의 이론은 그 상황을 구분하기 어려운 탓에 각 진영에서 자신의 입맛대로 사용할 우려가 크다. 그러한 일이 용인된다면 자신의 사람이라 믿었던 사람이 언제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애매모호한 입장에 맞춰 배신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주관을 가진 자에게서 애국심이나 충성심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런 문제를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마키아벨리가 국가를 다스림에 있어ㅡ비록 위기 상황으로 한정하고 있지만ㅡ도덕보다는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중시하여 비난받았다는 주장은 한 가지 오해를 일으킨다. 그것은 마치 중세 국가의 군주들이 도덕과 윤리를 기반으로 국가를 다스린 듯한 착각이다. 역사를 통틀어 국가 간의 대결과 정치에서 힘과 권모술수가 사용되지 않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지배자와 정치인 모두는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어떤 일을 벌인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들 중 권모술수에 능하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부족했던 건 덕이 충만한 사회였다. 마키아벨리는 덕의 정치가 국가를 나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덕의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으니 마키아벨리의 비판은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마키아벨리가 주장했던 냉혹한 위기관리 능력은 오히려 시류에 편승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렵게 된다.


저자는 마키아벨리가 생전에 제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군주론>에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정치론엔 뚜렷한 한계점이 보이고, 그렇기에 그가 메디치가의 정권 복귀 이후 중용되었다 하더라도 어떤 위업을 이루었으리라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마키아벨리를 악마로 묘사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정의를 힘의 논리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의심의 눈길을 피하기는 어렵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