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란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앞엔 모델하우스가 하나 서 있었고 건물 외벽엔' XX 모델하우스 Grand Open'이라 쓰인 거대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계단 층계참에 놓여 있는 큼지막한 스피커 옆엔 그보다 더 커다란 유리문이 방문객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 안쪽엔 하얀색 옷으로 단장을 한 젊은 안내원이 서 있었다. 안내원은 어떻게 오셨느냐 물었고 나는 모델하우스를 둘러보러 왔다고 답했다. 안내원은 누구의 소개로 왔느냐고 다시 물었다. 어떤 부동산의 소개로 왔다고 하자 안내원은 해당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어 확인을 했다. 까다롭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가 바로 연결되지 않아 우리는 한동안 로비에 서 있어야 했다. 난 하릴없이 건물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모델하우스 내부는 무척 한산하여 돌아다니는 사람을 보기 어려웠다. 그 사이 아내와 아이는 화장실에 다녀왔다.
확인 절차를 끝낸 안내원이 누군가에게 무전으로 연락을 했다. 안내원은 꼭 보안 요원처럼 보였다. 잠시 후 로비를 서성이고 있던 내게 한 사내가 다가왔다. 검은 정장 차림의 말쑥한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내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나는 얼마간 답을 했다. 그러다 전시되어 있는 아파트 내부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제야 그는 다소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우릴 전시실로 안내했다.
난 내부를 둘러보는 내내 침잠했던 분위기를 깨고자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고 무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개는 조용했다. 우리를 안내하던 중년 사내는 기회를 보아 아파트의 몇 가지 특색을 소개하기도 했다. 무거운 분위기가 어색했기에 그의 음성이 반갑게 느껴졌다. 난 아내에게 내부가 어떤지 물었지만 아내는 '좋다'라는 식의 평범한 반응만을 보였다. 아내는 전시실의 인테리어나 구조보다는 아이를 더 신경 쓰는 듯했다. 아내의 눈은 대개 아이를 향하고 있었다. 아내는 내부를 잠깐 둘러보더니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거실 주변을 서성였다. 어쩌면 허리가 아픈 것일지도 몰랐다. 아내는 웃음이 많은 편이었지만 감탄사에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난 아내와 잠시 떨어져 모델하우스의 부엌 구획으로 들어갔다.
2.
요즘 아파트의 부엌에는 발코니라 부르는 공간이 붙어 있다. 다용도로 쓰는 공간인데, 이곳에 선반을 달아 여러 그릇들을 보관하는 등 부엌용 창고로 쓰는 경우가 많다. 또한 세탁기나 김치 냉장고를 두기도 한다. 아파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특별할 게 없는 공간이지만 이 아파트의 발코니엔 보조 싱크대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여 내 관심을 끌었다. 내가 이 모델하우스를 직접 방문한 건 보조 싱크대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난 아일랜드 식탁과 싱크대를 건성으로 기웃거린 뒤ㅡ인테리어 자재는 브랜드 건설사라 해도 좋게 평가하기가 매우 어려워서 차마 자세히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ㅡ곧장 보조 주방으로 갔다. 그런데 기대했던 싱크대가 보이지 않았다. 발코니라 부르는 공간은 아무런 인테리어도 되어 있지 않은 채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여기 싱크대가 있는 걸로 아는데 여긴 없네요?" 나는 내 뒤에 서 있던 중년 사내에게 물었다.
"1차 아파트에는 이곳에 보조 싱크대를 설치했는데요, 2차에선 보조 싱크대를 뺐습니다." 그가 겸연쩍게 대답했다.
"아, 보조 싱크대 좋았는데 왜 뺐을까요?" 내가 다시 묻자 그가 보충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에 싱크대를 설치하면 공간이 좁아지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이곳에서 김장 같은 거, 그런 작업을 하는데 불편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그런 불편사항을 반영해서 2차에는 보조 싱크대를 넣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여기에 싱크대가 있으면 랙 같은 걸 설치하기도 어렵고요."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장? 요즘 누가 집에서 김장을 한다는 거지? 하기야 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을 테지. 그럼 이 아파트는 젊은 층을 판매 대상으로 잡지 않은 건가. 아니면 시공비를 줄이려고 빼버린 뒤에 적당한 이유를 붙여 설명하고 있는 걸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다.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수칙 중의 하나. 그건 솔직한 답변을 기대할 수 없을 땐 애초에 묻지 말라는 것이다.
3.
나는 이따금씩 아내의 친척 분이 머무르고 계신 강원도의 한 단독주택에 찾아가곤 한다. 최근 구조 변경을 한 주택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는 실내에 구획을 나누는 벽이 있었는데 그 벽을 철거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그래서인지 거실과 부엌이 하나로 이어져 있어 무척 넓어 보였다. 마치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아파트의 평면을 반영한 구조처럼 보였다.
다만 화장실은 옛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화장실이 아파트의 욕실과는 다르게 매우 넓어서 욕실에 일반적으로 갖춰두는 세면대와 샤워 시설, 양변기뿐만 아니라 세탁기까지 들여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고도 공간이 남아서 어른 몇 명이 누울 정도가 되었다. 화장실의 크기를 최대한 줄여서 거실과 방의 면적을 확보하려는 요즘의 아파트 추세와는 상당히 다른 형태였다.
이처럼 단독주택의 화장실을 커다란 형태로 구획하는 것은 몇십 년 전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일이었다. 기존의 변소는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욕조를 갖춘 화장실로 변모해 갔지만 단독주택과 빌라에는 이런 변화가 늦게 찾아왔다. 단독주택은 구조상 아파트와 달리 발코니가 없었다. 당시 아파트 입주민들은 발코니에 세탁기를 두는 것은 물론, 불편하기는 했지만 장독까지 그런대로 세워둘 수 있었다. 단독주택 주민들은 마당이 있어 장독을 두기는 편했으나 세탁기를 실외에 둘 수는 없었다. 결국 단독주택의 습식 공간은 빨래와 세면과 용변과 부엌일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도록 하나로 합쳐지게 되었다. 빨래와 세면과 용변과 부엌일은 모두 물이 있어야 가능했기에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져도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공간이 합쳐져 넓어지자 초기 아파트에서는 누릴 수 없었던 장점이 생겨났다. 바로 김장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었다. 1
해방 이후 관에서 주도한 아파트가 도입되기 시작했을 때 아파트 입주민들은 몇 가지 난처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파트 내부에 김장을 할 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이전까지 사실상 실외에 위치하였던 부엌ㅡ당시 부엌은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니는 공간이었다ㅡ이 실내로 들어오면서, 그간 가사 노동을 고되게 하는 주원인이었던 부뚜막의 아궁이 노동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부엌이 실내로 들어오자 이제 마음대로 물을 사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물을 폭넓게 사용해도 되는 공간이 싱크대의 싱크볼 정도로 한정되자 김장처럼 물을 많이 써야 하는 작업을 하기가 어렵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차선책으로 아파트의 부엌 옆에 위치한 다용도실이 점차 넓어지게 되었다. 습식 부엌을 바라는 주부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주택 계획에서 다양한 가사 작업을 할 수 있는 다용도실이라는 공간이 부엌의 연장 공간으로 계획된 것은 매우 큰 특징"이었다. 2
단독주택은 다용도실 대신 넓은 욕실 구조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독주택은 마당이 있어서 아파트보다 물의 사용이 자유로웠지만 실외인 탓에 추위와 궂은 날씨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추운 겨울철에도 김장이나 손빨래를 하며 떨지 않아도 되는 따뜻한 실내에서의 작업은 상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단독주택들은 초기와 달리 점차 넓은 욕실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단독주택 거주민들은 그곳에서 손도 씻고 볼일도 보고 샤워도 하고 세탁기도 돌리고 손빨래도 하고 김장도 하였다.
4.
난 외가댁의 옛 단독주택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가 많았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을 적잖이 기억해 낼 수 있다.
외가댁의 옛 단독주택은 현대의 아파트는 물론 최근의 단독주택과도 구조가 확연히 달랐다. 그 집은 안방 바로 옆에 부엌이 있었다. 꽤 특이한 구조였다. 지금 젊은 사람들에겐 부엌과 거실이 붙어 있고 안방, 즉 부부 침실과 부엌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게 너무나도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외가댁은 부엌과 마루ㅡ지금으로 따지면 거실ㅡ가 서로 떨어져 있었다. 부엌은 이상하게도 안방과 붙어 있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오갈 수 있었다. 명절이면 외할머니와 외숙모님은 부엌에 들어가 음식을 만들었고, 나는 만들어진 음식을 부엌에서 안방으로 부지런히 옮기곤 했는데, 문 하나만 열면 바로 안방이라 옮기는 일이 무척 수월했다. 사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시 지어진 주택들은 거의 모두 부엌과 안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엔 좌식 생활을 하였기에 식사를 안방에서 하였고, 그래서 음식을 끼니때마다 모두 안방으로 옮겨야 했다. 하루에 최소 세 번씩 해야 하는 그 일을 단순화하려면 부엌은 안방과 붙어 있어야 했다. 예전에는 제사도 모두 안방에서 지냈으니 부엌과 안방은 가까울수록 좋았다.
더 오래된 집들은 부엌의 아궁이에서 불을 때서 안방을 따뜻하게 데워야 했기에 그런 이유에서라도 안방과 부엌은 가까이 붙어 있어야 했다. 내가 머물던 당시의 외가댁은 부엌에 아궁이가 없었지만 아궁이에서 불을 때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은 안방 바닥과 부엌 바닥의 높이차였다. 당시 외가댁의 부엌 바닥은 안방 바닥보다 많이 낮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안방과 부엌의 바닥 차가 40cm는 되었던 것 같다. 그 정도의 높이차는 분명 아궁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머무르던 때엔 아궁이가 없었으니, 아마도 나중에 연탄보일러가 도입되어 아궁이를 없애버렸거나, 아니면 아궁이가 있던 시절의 단독주택 구조를 그대로 본떠 만든 탓에 바닥 간의 불필요한 높이차마저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때의 부엌은 여전히 신발을 신은 채 돌아다니는 공간이었으므로 부뚜막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안방과는 단차를 두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당시 부엌 천장엔 내가 가장 좋아했던 공간인 다락이 있었다. 부엌 한쪽에 작은 사다리가 놓여 있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면 작은 다락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락엔 온갖 음식 재료가 쌓여 있었다. 덩치가 작았던 나는 그곳에 올라가 놀기도 하였고 친척 분들의 주문에 따라 다락에 놓여 있든 음식들을 꺼내 부엌으로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이렇게 부엌에 다락을 놓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안방과의 바닥 높이차 때문이었다. 부엌이 실외 혹은 반실 외에 있었던 시기엔 구들을 데워야 하는 아궁이 때문에 부엌이 안방보다 항상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 그 때문에 천장 높이가 안방보다 더 높았다. 어떤 주택들은 그 높은 공간을 활용하여 다락을 만들기도 했는데 내 외가댁도 그런 점을 활용한 것이다. 다만 바닥 높이차만큼만 활용할 수 있었기에 다락의 천장은 매우 낮았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난다. 천장이 너무 낮은 탓에 키가 작았던 그때의 나조차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던, 창이 없어 항상 어두컴컴했던 다락방이. 천장에 달린 다락방의 문을 열면 습하고 차가운 기운을 품은 달콤하면서도 매캐한 향이 내 코를 자극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가보니 사다리가 치워져 있었고 다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난 다락방에 올라가고 싶어 사다리를 찾았지만 어른들은 이제 다락방엔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난 이유를 물어보았을까? 아쉽게도 그 기억은 너무 희미하여 확실치 않다. 어쩌면 당시의 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을 들어 기억이 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많은 일들이 그렇다. 과거에 무슨 일이 '어려웠던' 이유는 당시 우리가 '어렸기' 때문이었으니.
5.
해방 후 서양식 문물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마당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의 분산배치는 거실, 안방, 부엌 등이 서로 붙어 있는 밀집 구성으로 변화하였는데, 변소만큼은 그 변화에 끼지 못했다. 변소는 여전히 별도의 건물로 만들어져 집에서 되도록 먼 곳에 세워졌다.
내가 자랐던 외가댁도 양옥주택이었으나 변소만큼은 마당 건너편의 어두운 곳에 따로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상수도, 연탄보일러 등의 도입으로 생활환경이 개선되었지만 변소는 위생과 하수도 분야가 개선되는데 적잖은 시간이 걸렸기에 실내로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공포라는 감정을 알고부터는 외가댁에 가는 걸 꺼리기도 하였는데, 밤이면 잘 보이지 않는 그 어두침침한 공간에 갔다가 변기 구멍에 빠지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냄새의 불쾌함은 덤이었다. 그러다 보니 외가댁 마루에 주전자처럼 생긴 요강이라는 물건을 두게 되었다. 어릴 적인 그것이 온전히 '내 것'인 줄로만 알았다. 어른들도 밤중이나 비가 올 땐 변소에 가는 걸 꺼려 집안에서 요강을 사용했다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외가댁에 수세식 변기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6.
"계약하시죠? 지금 계약하시면 원하는 층과 호수를 바로 정할 수 있고요. 좋은 위치는 얼마 안 남았어요."
중년의 사내가 재촉했지만 난 애초에 바로 계약할 생각이 없었기에 뜸을 들였다. 난 아이와 함께 막 돌아와 내 곁에 앉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내는 부른 배를 한 손으로 감싼 채 의자에 앉으며 '이제 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생각해?"
"넓고 좋네."
아내는 시원스레, 살며시 미소 지으며, 하지만 다소 지친 목소리로 답했다. 중년의 사내는 아내의 말에 힘을 얻어 당장 계약에 필요한 금액과 중도금, 잔금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싱크대를 치워버린 보조 주방의 휑한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보조 주방이 생기면 일주일에 한 번씩 숫돌에 칼을 갈 거라며 좋아했던 내 모습을 이 사내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그러한 공간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도,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가 먼 훗날 추억하게 될 집의 공간과 풍경이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서도. 난 모델하우스를 나서며 아이를 들어 품에 앉았다. 아이의 손에는 모델하우스 관계자가 주었다는 열쇠고리가 선물처럼 들려 있었다.
외가댁에 남아 있는 오래된 절구통. 집은 바뀌었으나 옛 물건은 남아 있다. 2018. 9. 2.
외가댁의 텃밭. 예전엔 이 자리에 재래식 변소와 별채가 있었다. 2018.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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